■ 평론

황 창 우

성(性)의 존재론적 의미

[오현경 신드롬]을 중심으로...

 

< 몇가지 흥미로운 의문점들...>
오현경... 또는 여성성
성의 역사
몸의 정치학
전방위 감시체제
관음증
비밀의 상징코드 "O" 또는 "X"
전체주의
비주류철학
포르노 테이프
WASP
지식인

 

■.PROLOUGE
이천 어딘가에서 엘리트 문하생들을 돌본다는 이문렬은 금년도 7개월간을 글 한줄도 못썼다고 하소연한다. 오로지 [플라톤]과 [공자]에 매달렸단다. 불쌍한 이문렬...!
그 이문렬을 {인물과 사상}의 저자인 전북대 신방과의 강준만은 신랄(?)하게 공격을 해왔지만 그의 글은 끝내 어딘가 미진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강준만은 이문렬이나 기득권자들을 주요 공격목표로 삼아 그들의 의식이 지향하는 바를 [현상학]적으로 어느 정도 설명하지만, 방법론상으로 볼 때 그들을 [해체]하는 데에까지는 실패한 듯 하다. 그러한 한계를 보인 그는 금년 무더운 여름에 {조선일보}에 대해서 일단 휴전을 신청했다.
그런가! 그렇다면 강준만도 불쌍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그것을 전제로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왜 강준만은 플라톤의 엘리트 지상주의(哲人政治)... 그리고 공자의 왕도정치나 역시 엘리트지상주의로부터 이문렬의 연원을 캐지 않는 것일까?
그 천하제일봉이라고 내심 자부심(그는 다른 문학가와 같이 설명되는 것마져 역겨워한다.) 대단한 이문렬이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극찬한 이인화와 그것을 전지면 특집으로 내준 {조선일보}를 왜 체계적으로 연계시키지 못하는가? 실질적인 지나족의 첫 나라인 {영원한 제국} 주(周)나라로 회귀(回歸)하고자 하는, 그리고 주리론자의 후손인 이인화(이인화의 본명은 류철균이다. 그는 {영원한 제국}에서의 주인공 이인몽의 처를 숨겨주고, 또한 그와 더불어 동반자적 입장을 고수하는 류치명... 실제로는 1855(철종 6년)년 병조참판시 장헌세자를 추증소청하다가 대사간 박래만에게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는 류치명의 7세손이다. 또한 그가 본명으로 쓴 첫 평론집이 {이문렬 평전}이기도 하면서 20대 후반에 명문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에 부임한 안동출신이기도 하다.)와 이문렬의 관계를 왜 문제삼지 않고 그 둘을 또는 그 셋을 각론으로만 취급하는가?
그리고 왜 다른 차원에서 [사회불평등계약론]이나 [사회생물학] 또는 [인종차별주의]를 들이대지 않는가?
강준만이나 문단은 현상학적 지엽론만으로 이문렬을 비평하려 든다. 아니 [비난]만을 하고 그들의 근원을 캐어 그들이 지향하는 바(은폐된 원리와 무의식적 전제들의 발견), 또는 그들의 영향이 미치고자 하는 범위와 대상에 대한 해부(지배적인 범위와 한계)는 게을리 함으로써 {비평}에 이르는 데에는 절대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렇다면 강준만이 조선일보에 대해 손을 뗐듯이 이쯤에서 이문렬에게도 손을 떼야 한다. 그리고 문단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그것이 솔직함을 담보로 한 공격적이고도 직선적인 그나 나약한 문단에게 차라리 어울리는 자화상이다. 인정하기는 싫겠지만...
마광수라는 학자/작가가 있다.
학자로서는 상당한 지식을 무기로 한 현학성으로 문학이나 문화를 논한다. 또한 작가로는 거의 직설적으로 {자유에의 용기}를 외친다. 어쩌면 그는 기존 질서에 도전함으로써, 차라리 체제 전복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찾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이문렬... 마광수 두 인물 모두 현학적인 인물이지만 가치지향적으로는 상당히 대비되는 인물들이다.
그렇듯이 성담론을 어둠침침한 뒷골목에서 연구실과 강당으로 이끈, 그러면서도 범성욕주의자로 낙인 찍히기 쉬운 프로이트... 이제는 잊힐만도 한 지겨운 마르크시즘... 그리고 성을 담론화한 미셸 푸코... 보수적이라 할 부뤼디의 문화와 권력의 담론... 돌뢰뮁의 존재론적 의미 등도 역시 복잡하고 현학적이긴 마찬가지여서 그들의 가치 지향도 좌와 우를 가로지른다. 복잡한 그믈망과 같이... 그러한 담론을 [오현경신드럼]을 중심으로 하여 변덕스런 문화 또는 그 권력과 종교적인 도그마가 판을 치는 이 난장판에서, 성담론이 어떻게 유효함을 인정받겠는가를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금년을 휘두른 아름다운 여인 오현경과 그 주변부에서 그 주체자로 등장하려는 기득권자와 우리에 관한 몇 가지 흥미로운 의문점을 갖고서 말이다..
 
■.오현경 신드롬
오현경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몇 년 전에 미스코리아로 기억을 하는데, 필자는 그녀와 또 다른 남자 탤런트 오현경, 그리고 근육질의 여자 탤런트 한명 등과 같은 이름으로 하여 계속 헷갈리고는 하였다.
오현경1, 오현경2, 오현경3.... 오현경n...
그러던 {오현경들}이 어느날 갑자기 새로운 상징기호로 다가온다.
아니 통약불가능했던 그 [오현경]이 [O]로 코드화 과정을 거친 후, 다시금 [오현경]이라는 키워드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 기능을 오현경 등장 전에는 미미하였지만 "나는 벗음으로써 존재한다"는 노랑나비 이승희가 담당했었다. 그렇지만 이승희는 이 단계에서 잊혀져 가는 암호가 되어버린다.
그렇다. 가볍게 두둘겨보자!
인터넷에서 오현경을 한번 쳐보자!
아무데서나 쳐보자! 한글검색어든 영어검색어든 상관없다. 당신이 머물러 있는 그곳에서 쳐보라! 한국이든 히말라야든 알래스카이든 상관없다.
수많은 [성인(成人) SITE]들이 당신에게 키(KEY)를 건네준다. 물론 그 방문 앞에는 "18세 미만은 출입을 금합니다"라는 팻말이 있다지만, 그것 역시 전유성의 "말리는 것들은 무조건 재미있다"라는 말의 불변/가역(不變/可逆)을 유효함으로 인정한다면, 그 말은 "흥미진진한 파라다이스가 여기 있습니다. 아! 그렇죠, 보는 사람도 없습니다"의 통과의례적인 부추김의 패스워드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여기서 통약된 [오현경]이 당대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키워드(Key Word)로서의 과정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사이버공간 뿐 아니다. 실체를 정확히 드러내지 않는 전략가들은 성의 담론(談論)을 공개적으로 촉진시키고 또한 강요하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오현경으로 실명화 되기 전... 그러니까 [O양]으로 회자되기 시작한지 몇 일만에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인터넷상으로의 시청여부가 (新)지식인의 변별력이 되기까지 하였다.
보다 나이 지긋한 층에서는 그 비디오 테이프의 선물 여부가 또한 사회에서의 성공 변별력과 처세술의 한 방법으로 이야기된다.
중년 여인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변강쇠남'에 대한 화제가 선망으로 바뀜과 동시에 남편의 무능력함이 비교되어 한숨 쉬고는 한다.
하다 못해 젊은 연인들은 그 동영상 파일을 인터넷으로 돌려보면서 희희낙낙까지 한다.
그렇다! 지금 당장 책을 덮고, [오현경]을 입력시켜 보라! 인터넷이든 가상공간이든 상관없다. 당신의 무의식 저 밑이라도 관계없다. 엔터 키를 쳐보라!
그리고 출력해 보라! 어떤 메세지가 뜨는가를...
그리고 기억하라! 지금 떠있는 메세지가 틀림없는 당신 것이라면, 그것은 당신의 본질이나 본능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문제 제기
청계천 비디오 판매점에서는 실명 비디오가 비싼 값으로 팔리기 시작했다.
질이 좋은 것은 거의 백만원대에 육박하고 조금 떨어지는 것은 20∼30만원에 팔린다.
그리고 잠시 후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상에 [O]양과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탈렌트 [L]양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불과 몇일 후 대중들은 눈치를 채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그 광란의 구역에 자진 편입하려는 성급함까지 보인다.
어느 사람은 개인적 배신감을 토로한다. 그 청초한 이미지로부터 난잡함의 배신감...
어느 사람은 현대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감을 점잖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담론한다.
그것을 언론은 여과없이-혹은 선정성까지 더해- 보도한다.
그리고서 과거의 미스코리아 출신의 탤런트 오현경은 죽고, 이후 문 밖 출입도 못하는 오현경이 태어나게 되며, 이어 새로운 [오현경]이라는 상징코드가 슬그머니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는 상황 끝이다. 아니 간혹가다가는 [오현경 동정론]도 일부 자리 잡기는 한다.
이것만이 진실인가? 당신이 끝까지 그렇게 우긴다면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담론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이글에서 공박의 대상으로 삼는 플라톤에게서 조차 멋진 논제를 제공받을 수 있다. 플라톤의 {향연(饗宴)}...
플라토닉 러브...육체적 접촉이 없는, 승화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 러브... 정신적 에로스... 상당히 소중하고 가치있는 말이다. 그 누구나 한번 쯤은 은밀히 꿈 꿀 수 있는 말이리라! 그러나 그것이 설령 선(善:Good)이라고 이름 붙여져 있더라도 저 건너에 있는 몸의 정치가 저급한 형태의 에로스 또는 절대 악이어야만 하는가?
육체와 정신을 관통하는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찾을 수 없을까? 이를테면 상동(相同)의 논리...
(그것을 전제로 하여) 이글을 읽는 분들... 한정되기는 하겠지만... 당신이 소위 보통의 상식인이라면 타자의 세계를 열린 세계 안에서 존중해야 한다는 점과, 이번 현상을 하나의 텍스트로써 당신이 갖고 있던 본래의 텍스트 개념의 세계와 연계(충돌이라는 말이 맞겠지만) 삼는 것도 그리 무가치한 일이 아니리라...
그렇게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필자가 느꼈던 문제점부터 이야기하고자 한다.
'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성의 담론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그 첫 번째 의문사항이다.
그 다음은 플라톤 또는 공자이후로부터 데카르트 시대에 확립된 '로고스(logos) 우선주의와 그에 대응하는 [몸에 정치학]이 이번 사건에서는 과연 어떻게 주장되고 유지하는가'에 대한 의문점이다.
물론 이 문제 제기에는 이른바 [여성죽이기]도 포함될 것이다.
보다 근본적이겠지만 우리는 이리 빨리도 [전방위감시체제]와 일상적 파시즘에 자발적으로 굴복하는 대중들의 무기력감에 대한 문제점... 그리고 시인(지식인)만의 특전인 절대영역(금기역)에 틈입하여...날줄과 씨줄에 대한 행간을 읽고 분석하고, 그것으로 그 성역에 과감히 도전해서 진실을 향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지 않는/못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성의 존재론적 의미
" 나는 사고한다. 고로 (이성적으로)존재한다...". "나는 sex를 한다. 고로 (실존적으로)존재한다".
데카르트가 한 말인가? 사르트르가 한 말인가? 아니 어쩌면 논자가 지어낸 말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그런 명분을 부여하는 차원에서 말을 풀어가 보자!
30억년전 박테리아의 짝짓기로 비롯되었을 성(性)... 10억년 전 암수가 구별되는 고등동물이 출현하여 성(性)을 종족보존을 위한 수단으로...
인간종족은 인류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수많은 새끼를 낳아 기르는 [R전략]에 대응하는, 가급적 새끼를 적게 낳아 완벽하게 기르려는 [k전략]의 극단에 서있다.
그럼으로써 성(性)은 생식작용(종족보존 수단)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어 무화과 잎에 당위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렇다면 무한정 낳아 기르는 것이 아닌 소수의 유전자를 물려 줄 타자(the Other)의 중요성은 의외로 고대에서부터 부각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한자 '요(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중요하다 요(要)'는 여성의 가임률을 확인해 주는 과거의 유일하다 싶이 한 성 또는 body signal이 된다. 즉 WHR(Waist Hip Ratio, 즉 허리대 엉덩이의 비율이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가임률과 상관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남성들도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지금 당신의 허리를 주시하고 있다고...)의 0.7의 비율을 말이다. 에덴동산의 하와도 그랬고 중세시대나 르네상스시대의 그 풍만한 나부(裸婦)도 그랬으며, 『보그지』에 실린 깡마른 모델 트위기도 역시 그 규정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더불어 우리가 미인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또한 지금의 미스코리아들도 그 규정은 아예 황금률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여성이 남성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떠한가? 그리고 무슨 느낌을 갖는가?
여기에서 우리 모두 솔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한번 반복하자면 당신은 남성성을 처음 대했을 때 어디를 처음 보는가?
어떤 이는 구두를 본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구두의 재질인 가죽이 어느 정도 고급하냐와 그리고 어느 정도의 복잡한 공정과정으로 정성을 들였느냐에 따라서 그가 소유한 부(富)를 단적으로 나타낸다면, 그것 역시 맞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솔직한 말은 남성의 손을 본다는 말이다. 의외로 TV대담에서 그러한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다. "개인의 기억은 단절되기 쉽지만 종족의 기억은 영원하다"라는 명제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더욱 확실성을 갖는다.
한자 '사위 서(壻)'가 처가집에 고기(月)를 많이 갖고 오는(疋) 영향력 있는 사람(士)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전제로 한다면, 고대의 남성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보다 근육질이며 보다 공격적인 남성 손에 들린 사냥감을 훔쳐본다는 말이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여성성은 보다 힘이 세고 건강한 남자가 습득하기 쉬운 단백질과 자기의 염색체를 교환함으로써, 강인하고 우등의 유전자를 보존하려는 의도된 행동인지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보다 확실한 것은 인간종족을 제외한 다른 포유류나 영장류의 암컷들은 배란(排卵)기 때만 수컷들의 관심을 모으는 것과는 달리 인간종족 여성들은 여성의 발정기가 사라짐으로... 생식의 합목적성을 초월한 섹슈얼리티를 위해 '항상' 남성들에게 매력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항상...
여성의 성징(性徵)인 유방(모든 포유류는 수유기(授乳期) 때만 나타난다)도 그러한 차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동물행동 인류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의 일부 주장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코스모스}의 우주과학자 (임종 전 임종세례를 거부한 불가지론자로 유명한) 칼 세이건의 부인인 도리언 세이건과 그의 아들 린 마굴라스 교수가 공저한 {섹스란 무엇인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모든 생물체 중 인간만이 성을 통해 쾌락을 얻고 그것에 의해 삶을 이어가는 유일한 동물이다"...
여기에 더하여 남성은 본능적으로 많은 자손을 남기고 싶어하여, 성적으로 다양한 변화모색과 성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확실한 가부장의 시대를 열어가게 되는 역사시대 이후... 성은 이중적 잣대를 강요받게 된다. 종족보존이라는 차원에서의 수동적 여성성의 성과, 성을 통해 종족보존보다 쾌락을 추구하는 능동적인 남성성으로서의 성(性)으로 말이다.
그리고 서구의 중세시대나 그 이후 종교나 법의 이름으로, 중국이나 우리의 조선조 주자학시대의 성은 알다시피 관리되고 심판 받는 열녀문의 시대였다는 것은 재론할 필요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중세 십자군 원정시대에 정조대(성적인 차원을 떠나서라도 인간자유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나 명나라의 탑대(搭臺:남편이나 약혼자가 홀로 된 여인이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레 목을 메는 곳), 우리나라의 열녀문 등은 여성들 입장에서 보자면 자기의 의사와 아무 상관없는 기득권체제(영광스런 국가와 가문)를 위한 생생한 희생제의의 상징물로 각인 될 것이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서구는 프로이트에 의해서 성담론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개방 이후에 [모던 걸]이나 [자유부인] 등의 출현에 의해, 인구(人口)에 회자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전지구적 동시다발적으로 문자·영상·인터넷 등에 의한 가상공간적 성의 범람이 급속히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으로써, 오현경 신드럼 역시 인터넷이 그 촉발시킨 것은 앞서 알아본 바와 같다.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보자면, 남성 정자(精子)의 급격한 감소도 팽창하는 인구조율을 위한 인간종족의 몸부림이란 해석도 나오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일일 것이다.
 
■.담론 그리고 침묵
우리의 선인들은 성과 관련된 담론과정에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곳] 또는 [글로 쓸 수 없는 곳]이라는 재치있는 표현으로 하고는 했다. 재치있는 표현?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금지'와 '비실재' 그리고 '침묵'을 강요하는 도덕적 엄격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지식인들 최대한의 담론과정이라면 대중들 역시 비슷한 은유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대에는 어떤가? 아직도 금기사항인가? 많이 개방되었다며...?
소설가 장정일이 1996년도 김영사에서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소설을 낸적이 있는데, 그 내용이 38살의 彫刻家와 18살짜리 女高生의 애정행각을 적나라(赤裸裸)하게 그렸다 해서 판금이 되었다. 아니 판금이 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구속과 출판사의 영업정지를 두려워한 자진(?) 절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이 이번에는 다큐멘터리 기법을 사용하여 논란을 일으킨 {나쁜 영화}의 장선우가 이 소설을 {거짓말}이라는 타이틀로 영화를 찍어 국내 뿐 아니라 국제영화제를 통하여 세기말적 담론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주요 대사(아니 그것이 거의 전부라고 한다. 아직 국내에는 상영보류등급관계로 신문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 나 X 하고 싶어"... "(몽둥이로)때려줘"... 그리고 그 나머지들은 내용이 비슷하거나 아니면 거의 바디랭귀지로 처리된다고 한다. 국내 상영여부가 불투명한 이 영화와 대비되는 영화가 {폴라 엑스}이다. 이 영화의 주요 내용은 이복남매간(異腹男妹間)의 성행위(性行爲), 그리고 오디푸스 컴플렉스의 행위암시(母子之間 行爲에 대한 暗示的 분위기), 또한 등장 배우들의 실제 성행위(實際 性行爲)를 촬영(撮影)한 최초(포르노가 아닌 일반 영화 중에서)의 영화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상영된다. 그리고 메이져 영화제인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분 본선에 오른 {거짓말}은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형식이 문제라면, 성기(性器)의 모자이크 처리보다, 실제 성행위의 촬영은 문제될 것 없다?
내용이 문제라면 성인과 여고생의 행위보다, 남매지간 또는 오디푸스컴플렉스의 행위가(암시적 분위가)가 문제될 것 없다?
당연히 가져야 할 의문부호이다...
이에 앞서 1992년도 연세대 국문과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로 구속되는 미증유의 사건(외설이라는 명목으로 근대 이후 세계 최초)이 있었다.
1969년 염재만의 {반노(叛奴)}가 외설죄로 기소되었지만, 그 때에는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는 불구속 상태였다. 마광수는 구속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것에 영향을 미친 이들이 손봉호, 구중서, 이태동, 안경환 등이며, "즐거운 사라를 읽고 난 뒤 내가 먼저 느껴야 했던 것은 구역질이었고 내뱉고 싶은 욕지기였다."는 문화권력자 이문렬 등 5∼6명의 지식인이었다.
이에 반해 고은·김주영·조세희 등의 217명의 문인이 항의서명을, 최일남·박범신·김병익 등 40여명의 지식인이 구속집행을 비판하는 글을 썼음에도 마광수는 끝내 형사처벌되는 세계문단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우를 선보였다.
우리 언중들은? "더러운 놈 같으니라고... 명색이 대학교수라는 것이 그런 욕지기 나는 글을 썼다니...싸지 싸!" 정도였을 것이다. 명분론을 앞세워 일상적으로 퍼져 있는 파시즘과 공권력의 무서움을 일깨워 주는 도덕적 테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것이 90년대를 살아가는 문단과 그 주변권력의 현주소다.
그런데도 사회일각에서는 성의 담론화가 일상사가 되는 모순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미혼 여성들이 섹스를 주제로 수다를 떠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잠자리를 소홀히 하는 남편회사를 고발하는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그리고 성문제로 고민하는 주부들의 아침TV방송에의 솔직한 체험담, '아우성(아름다운 우리의 성)'이라는 구성애의 스타 탄생, 그리고 천진난만한 여고 1년생의 성상담 싸이트의 인터넷 개설 등.
광고는 어떤가? 자동차 'AVANTE'의 후면 등은 성기(性器)를 모방, 성적 대리배설기구로서의 주고객층을 여성으로 타킷을 정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어느 립스틱 광고는 아예 큰 립스틱을 묘하게 껴 앉는 포즈를 취하고, 음료수류나 빙과류 등의 일부 광고는 Oral sex의 상징신호로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상당한 구매효과를 거둔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성에 대한 담론은 억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되고 있는 괴리(乖離)를 보이고 있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이쯤되면 우리는 한 해체주의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에 대해 그토록 말을 많이 함으로써, 성이 끼워 넣어진 바로 거기에서 세분화되고 칸막이되고 특성별로 명시된 그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실은 성을 거짓된 모습 밑에 은폐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닐까? 이 때 담론은 차폐막이며, 흩뜨림은 회피이다. - 미셸 푸코-
그런가? 단순히 그 차원인가? 이것을 달리보자!
폭력 중에서 통증 없는 '상징적 폭력'이 가장 무섭다고 한다. 그러한 폭력을 수반한 상징적 권력투쟁이 존재하는 한, 이와 같은 무질서할 정도의 성의 담론과정은 항상 사회질서로 환원되는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렇다면 "권력은 억압의 기제가 아니다"로서 반 마르크시즘적 입장을 취했던 미셸 푸코의 입장과 위계제의 정당화와 구심점을 향한 환원의 정당화 과정을 설파하는 보수주의적 색채가 짙은 이 말의 차이는 대체 무엇인가? 생각 해 볼 일이다.
그리고 남성 또는 권력기제는 인식의 거부나 희피를 빌미로 엄숙주의자로 위장하여 오랜 침묵 속으로 달아나게 된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면 오현경 신드롬은 성의 담론을 공론화시켰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빌미로 금기와 통제를 내포한 통제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쾌락과 노동력의 집약이 양립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지는 선동과 강화의 효과를 거두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선동의 기제에 종속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다 아는 공개된 비밀을 놓고 말이다.
 
■.포르노와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 이데올르기의 공고화
일반 영화에도 등급이 있듯이 포르노 비디오도 역시 여러 등급이 있을 것이다.
휴 헤프너의 [플레이보이]비디오는 탐미적 영상미학을 밑에 깔아 혐오감을 줄이려는 영특함을 보인다. [펜트하우스]의 테이프는 보다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유럽계 테이프가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적이고 보다 사실적이라면 미국계는 작위적인 면이 많아 보이면서도 보다 우리에게 일반적인 테이프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일본 것은 강한 자에게는 절대복종하는 매조히즘적 쾌감과 약한 자에게는 가혹한 잔혹성을 발휘하는 새디히즘에의 새도매조히스틱(Sadomasochistic)의 합일을 지향한다 .
그렇다면 오현경 테이프는 어느 범주에 속할까? 그 무엇이길래 대중들을 그 광란의 질곡으로 몰고 갔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오현경 테이프는 포르노가 아니다. 포르노가 아니라는 점이 오히려 대중들을 쉽게 흡인하였다. 아니 그 테이프가 포르노가 아니라니...!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그것을 포르노라고 이름붙이려면 [남성중심적]이라는 大前提를 만족시켜야 한다.
헐리우드를 예로 들어보자! 헐리우드 스타 시스템에는 흑인 여배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현재 우피 골드 버그 한 명 정도일텐데, 그녀마저 흑인과 하층민들에게 시장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 입지가 가능({스타덤 : 욕망의 산업}, 크리스틴 글레드힐)하고 나머지는 백인 여성 일색이다. 왜일까? 그것은 백인 남성들이 지배하는 미국(유럽)사회와 그것을 동경하는 White Complex인(人)들 에서는 시장가치가 없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겠지만, 보다 근원적으로는 파워엘리트 또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 앵글로 색슨계, 백인계이면서 개신교신자)의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헐리우드 문화가 이렇다면 포르노 역시 그것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거니와 오히려 그것을 확대재상산하는 첨병으로 보아야 한다.
포르노는 첫 번째로 우선 촉각중심이 아닌 남성을 위한 시각중심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남근숭배사상에 충실하게 하여 남성들에게 대리만족(어쩌면 컴플렉스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을 시켜 줘야 한다.
이들을 위해서는 big(extrreme) close up 기법... 더불어 hyporealism(극사실주의:極寫實主義)적인 화면조작과 천천히 엿보기 기법을 사용하여 관능적 영상의 창조를 해야 한다.
결정적으로는 남녀의 합일 된 오르가즘의 지향인 아닌, 그 클라이막스에서 여성성은 철저히 배제(성적인 관계에서 가장 일반화된 부정행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지금도 아프리카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는 여성할례 '음핵절제(陰核切除)'의 다름아닐 정도로 가혹해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전제 조건을 만족해야만 포르노 테이프는 생산주체이면서 또한 소비주체인 남성들에게 최소한의 생존성을 갖출 수가 있게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현경의 것은 적어도 그러한 인위적 장치가 배제되어 있다. 그 흔하디 흔한 줌-인(zoom-in) 기능이나 이동촬영도 없다. 3차원적 구성이 아니라 1차원적 구성이라는 점에서 우선 시각중심제를 배제시켰다는 공평성을 앞세우게 된다.
또한 그러한 카메라 워크가 없다보니 과장된 남근숭배사상을 표현할 길이 없다.
더불어 이 비디오는 젊은 남녀가 상호호혜원칙에서 그야말로 즐기면서 또한 즐거움을 주고받고 있음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있을 수 있는 젊은 날의 초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남의 정사를 담은 기록물을 훔쳐보는 단순한 관음증만으로 그렇게 열광하였을까?
 
■.몸의 정치학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그것에 대한 앞선 설명으로 보다 '시(視)'자와 시각중심제, 육체를 나타내는 상징기호인 '月'과 달의 기호인 月에 합일성, 그리고 몸의 정치학에 대해서 간단히 짚고 넘어가야 할 순서일 듯 싶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육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리하여 그 하위, 또는 종속개념으로 본 것이 서양의 플라톤(이데아론 또는 철인정치)이라면 동양은 교육을 받은 엘리트주의자로서의 공자(君君父父子子)이다. 또한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서양이 데카르트라면 동양은 성리학이다. 이로부터 이념적으로 상과 하, 소유한 자아와 종속된 타자, 지도해야 할 자와 따라야 할 자의 명분이 성립된다. 왕은 신하를, 사대부는 평민을, 양반은 상놈을, 태양은 달을, 남자는 여자를, 이성은 감성(또는 육체)을 말이다.
이럼으로써 로고스에 대응하는 외향성인 신체, 특히 남근일원론에 조응하는 [여성의 육체]는 이러한 논리로 보자면 ' 따르고 따라야' 만 될 반복 수동성으로 나타나게 되는 논리형식에 부합하게 된다.
이리 본다면 여성성의 은밀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달과 육체를 뜻하는 기호가 똑같이 월(月)로 나타나는 것은 현상학적으로 보자면 자못 의미심장하다.
데카르트의 혼(국립중앙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그 혼이 어떻게 분철되어 있는가를...)인 <코키토>가 이데아나 관념자체에 특권을 부여하여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3차원적 거리 둠의 감각으로 남성적 시각에 그 특권을 부여하고 있다면, 동양에서는 높은 제단(alter:示)위에 앉아서 내려보는 것(見)인 '바라보다 시(視)'와 그 동질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남자는 정신(그 머리)이면서 그 시각중심적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고 여성성은 (머리, 즉 이성으부터)지배받아야 될 육체이면서 시각주의의 타자(他者)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것에 대한 반동으로 니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인간에게 몸 아닌 것은 없으며 영혼은 몸에 관련된 어떤 부분일 뿐"이라는 명제를 발표하여 현대 철학 특히 탈구조적이고 현상학적이면서도 해체적인 푸코, 자크 데리다, 라캉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사이 마르크스 등의 유물론(唯物論)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현상계와 화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데카르트나 플라톤의 유심론(唯心論)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 무망(無望)한 마르크스의 열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의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 '신체 페미니즘(corporeal feminism)'이나 육체/여성성/달/대지 등을 통합하는 '에코 페미니즘'의 등장 등은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시각중심주의로부터 만짐 또는 참여 또는 합일 된 감각으로서의 '몸의 정치'(미국 모라비언 대학의 정화열의 {몸의 정치}참조)를 회복시키게 된다. 여성적인 것 또는 육체적인 것에 대한 열반(涅槃)의 원리이자 신체 페미니즘의 제 1원리라 할 전신적 기쁨... 문명과 자연,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합일을 지향하는 에코 페미니즘의 원리를 생각한다면, 시각중심주의로부터의 거리 둠이 아닌 그 둘만의 참여와 합일의 의식을 지향하는, 그럼으로써 통제와 권력의 기제로부터 벗어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서 대중(특히 여성들...)들은 환호했을지 모를 일이다. 여성성을 대표하는 오현경을 위한 참여와 합일의 드라마를 보고서 말이다.
거기에는 디지털 전자신호로 매개되는 음성/영상적 환타지나 혹은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 스페이스적 가상 섹스도 거부한다. 오로지 진실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거리 둠의 한 방법인 말하기의 반대편에 서있는 침묵... 그것을 [구체화시킨 행동]만이 있을 뿐이다.
분위기로 말하고 냄새로 느끼며, 땀으로 말하고 전율로 화답하는 희열로 존재할 뿐인 것이다. 더하여 거기에서 상대(타자)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고, 자아 속에서 타자를 발견하여 우리를 지향하게 된다. 그것이 곧 정화열이 말한대로 [대화변증법의 원리를 이루고 있는 사이-나눔]의 관계일 것이다.
 
■.여성 죽이기 그 마녀사냥(witch hunt)
고대 이집트나 인도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에도 널리 퍼져 있었고, 요즘 아프리카에도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마녀사냥]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의 시초는 12세기 말 카톨릭교회가 사회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이단적(異端的) 신앙을 공격하기 위해서 비롯되었다. 그 희생의 대표적 인물은 프랑스의 애국소녀 쟌 다르크 (1412∼1431)로 그녀는 1429년 무력한 왕태자 샤를(훗날 샤를 7세)을 대신해 영국과의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렇지만 후에 영국군에 체포되었을 때 샤를의 방조 속에 쟌 다르크(아마도 깃발을 든 채, 젖가슴을 드러내고 프랑스군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는 영국에서 화형식을 당하게 된다. 중세시대를 풍미한 이 마녀사냥은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시대인 16∼17세기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1950년 2월 9일 강경한 보수우익자 메카시 공화당 상원의원의 한 마디, "국무성의 공산당원 205명의 명단(실은 그 종이는 백지였다)이 여기 있다"로 불기 시작한 1950∼1954년에의 '메카시즘' 광풍은 또 다른 형태의 마녀사냥이라고 할 수 있다.
마녀사냥... 현대적의미로 본다면 '권력자들이 도덕적 공황상태를 이용하여 지명도가 있는 특정 개인(또는 집단)에 죄를 뒤집어 씌어 희생양으로 삼아 정국을 돌파하여 권력을 유지' 하는 것의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고 있다.
그런데 다른 형태의 마녀사냥인 옷로비 사건의 청문회가 있었다.
옷 로비 사건의 주역은 옷가게 주인 정일순(비극에서 가장 코메디적인 인물... 동정심을 유발하는 자), 그 뚜쟁이 역할을 한 통일원 장관의 부인 배정숙(진실도 모르고 중개를 해야하는 비극적 조연), 그리고 물주 역할을 한 신동아 그릅 최회장의 부인 이형자(전국민, 또는 관객을 대상으로 한 변사... 또는 나레이터), 그리고 공납을 받은 실세 부인 연정희(끝내 주인공이고자 하는 사모님인 여인) 등의 네 명과 청와대 정무수석 김정길의 부인 이연희 등이다.
일단 화형식에 오른 인물은 앞서의 네 명이고 이연희는 시아버지의 병수발과 조선조 선비의 낙향과도 같은, 7살짜리 아들과 밭을 일구기 위한 비장한 출사표를 던짐(진의의 가부를 묻기 전에... 대단한 사람이다)으로써, 화형대에서 간신히 내려 온 여인이다.
마녀사냥...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연극인이자 방송인 손숙. 조금 말랐으면서도 약간은 가식적인 행동 때문에 개인적으로 별로 맘에 들어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러시아 방문 때, 경제인으로부터 2만 불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어 각료에 취임한지 얼마 안되어 [남성공화국]에서 물러난 인물이다.
물러나게 된 배경이 남성들이 장악하고 있는 관료제의 조직적 반발도 한몫 거들었을 터이지만 남성들이 완전 장악하고 있는 정치부 기자들, 데스크 등에의 언론 십자포화도 실로 만만치 않았다. 오죽하면 한 언론인은 손숙에 대한 마녀화형식에 불 지핌을 공개사과까지 했을 정도인가? 그렇다면 어느 젊은 비평가의 말과 같이 대한민국은 "암탉이 울면 오페라하우스가 내려앉는다고 믿는 멍청한 수탉들이 영계나 밝히면서 살아가는 대한양계장"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수수방관한 우리들... 언중들은 여기에서 절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오히려 항상 화제와 선정성을 동반하는 그 마녀사냥을 부추기고 즐기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오현경은 어떤가?
있을 수 있는 젊은이들의 한 프라이버시 노출로 인하여 집밖에도 나오기도 힘든 상황으로 화형식까지 완벽하게 끝난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한 가지 희한안 점은 대중들은 오현경의 상대역에 관하여 전혀 관심도 없거니와 또한 언론도 상품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다못해 여성계에서도 그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하고 그 맞불 작전으로도 나갈 상황인데도 말이다. 그 상대역 역시 당시에는 오현경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연예계의 중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을 몇 가지 이유로서 풀어보자!
모나코의 왕비로서 몇 년 전 사망한 그레이스 켈리와 마를린 먼로라는 동시대의 배우가 있었다. 그레이스는 말 그대로 우아한 배경 출신과 그에 걸맞는 배역 {다이얼 M을 돌려라}, 그리고 그 홍보효과로 지적이고 우아한 스타이미지를 고착시킨다.
마를린은 그녀의 불우한 집안 환경... 그것은 걸맞는 배역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등에 의해 더욱 강조되어 "즐기는 상대"로 전형화 되어 헐리우드 기업 이윤 창출을 극대화한다. 마를린은 즐기는 상대에 더욱 어울리게 머리 속이 텅 비어 있는 [백치미]를 강조하기까지 한다. 그래서인지 형인 죤. F. 케네디나 아우 로버트 케니디와의 성적(性的) 삼각 염문설을 퍼뜨렸음에도 불구하고 법의 심판은커녕 도덕적 심판조차 받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어떤가? 개신교 중 가장 보수적 색채가 강한 남부침례교인(뉴트 킹크리치 전 하원의장, 그리고 트랜토 로트 상원원내총무 등의 보수우익자들도 이 교인이다.)인 클린턴의 염문상대 중 가장 부각된 여성이 르윈스키였는데, 그녀는 WASP와는 거리가 먼 이민 후손의 딸이다.
그렇다면 유부남들인 케네디 형제가 그레이스 켈리, 혹은 클린턴이 동부출신의 앵글로색슨족 개신교 양가집 규수와 성추문을 뿌렸다면 그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그것의 해결방안은 의외로 우리 재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결혼을 빙자 1년간 70여명의 미혼여성을 농락했던 박인수(당시 26세)사건에서 서울지방법원법정은 1955. 7. 22일 "...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을 보호..."라는 희대의 명언을 낭독했다.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소리이리라...(진실로 그 한국적 상황을 기억하라!)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그리고 신자본주의를 움직이는 WASP나 POWER ELLITE 집단에서 보자면, 케네디 형제나 클린턴은 당연히 무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마를린 먼로는 보호해야 될 지적이고 정숙한 여인이라기보다는 즐기는 상대였을 뿐이고, 르윈스키는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여인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오현경 죽이기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녀는 그렇게 죽어야만 될 무가치의 여인인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아닐뿐더러 오히려 역설의 논리를 제공하기 조차한다. 마녀화형식의 주인공은 네 명의 여인들처럼 사회적 지명도가 있을 때 반대급부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다수일 때보다는 잔 다르크처럼 홀로일 때 그 비극적 효과가 극대화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일 터...
그러한 모든 구비조건을 미스코리아 출신 오현경은 완벽하게 갖춘다.
미스코리아... 그것이 오현경이든 이승연이든, 또는 고현정이든 상관없다. 단지 여성성, 처녀성과 그 대표적 상징인 [미스 코리아]라는 타이틀이 중요할 뿐이다. 특히 그 처녀성은 대한민국의 남성, 특히나 보수주의적 기득권체제에서 보자면 당연히 그리고 온전히 지켜야 할 제1의 덕목인 것이다. 여성들이 오현경 테이프에서 시각중심주의를 배제하고 촉각을 중시한 몸의 정치학에 함몰되어 갔다면, 대표적 상징성을 갖는 처녀성은 만천하에 자발적이고 [공개적] 상실이라는 점에서 보수적 기득권체제에서의 격렬한 증오와 진보적 남성사회에서조차 애증(愛憎)병존의 양가감정이라는 [동시적 딜레마]속에서 사라져 간 것이다.
꺼진 잿더미 속으로 추방당한, 사회로부터 거부 된 Pariah(추방당한, 묻혀버린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마녀사냥을 통한 속죄양을 만듦으로써 "대중의 수동적이면서 매조히즘적 안정심리를 충족시키고, 또한 상호보완적인 기득권 우위의 새디즘적인 새로운 [권력]의 기반이 되게 하는 충실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전방위적 감시체제와 전체주의
오현경의 동시 다발적 진실게임...
당신의 자녀나 친구가 신혼여행이나 러브호텔에 가면 한가지 주의의 말씀을 당부를 하시라... 1mm의 펜촉(또는 전등이나 액자 속에 있는 볼펜촉 크기의 초소형 렌즈)을 조심하라고... 불도 끄고... 항시 이불을 덮고 있으라고...단돈 15만원이면 언제 어느 상황이든지 촬영가능한 게 지금의 실정이고... 그것은 곧 편당 고가의 값인 라이브 필름(소위 몰카 비디오)으로 유통되어 공개된다고...
이것이 있을 수 있는 y담이라면, 노동계, 정·재계, 종교, 언론계 등 사회지도층 인사는 대부분이 감청대상(1만 명이라고 하지만 글쎄...)에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상기해보기를 바란다. 후후! 어느 불쌍한 정치인은 휴대폰 20개의 비밀번호를 개설해 놓고 수시로 바꿔가며 통화를 한다고 하며 전직 대통령들도 감청대상에 있어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법적 근거도 없이 통화내역도 수시로 제출해야하는 통신회사들의 고충도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고, 인터넷 시대에서 채팅이나 e메일은 완전 무방비라는 것을 특히 염두(당신이 그래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일반적 감시대상의 범주'에 없기 때문이리라)해 두어야 한다.
더불어 금년도 전자주민증과 신용카드결제 면세라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조차 그 셀 수도 없는 인공위성들이 우리를 내려보며 사진을 계속 찍어대고 있다면, 이제는 거의, 아니 100% '전방위감시체제'에 노출되어 있을 터이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그 수집된 정보는 오현경 비디오와 같이 전세계 동시적으로 다 아는 비밀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전방위적 감시체제를 일찍이 전세계에 알린 이는 죠지 오웰이다. 1945년 {동물농장}이라는 풍자소설을 쓴 그는 3년 후, 즉 우리가 광복을 맞이하였을 때, 20세기를 움직인 책 중의 하나인,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인, 그러니까 러시아 작가 E. 자마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20세기 '부정적 미래(디스토피아)문학' 중 하나로 꼽히는 {1984년}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평화]나 [자유]같은 전체주의(全體主義)에 반하는 말을 모조리 없애 버린 [신어(新語)체계], 모든 기록의 날조를 통한 [과거통제] 그리고 길거리, 방, 화장실에까지 설치된 감시 스크린으로 이루어지는 [사상통제] 등으로 완벽한 전체주의를 구성한다.
그러한 전체주의 속에서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당의 독재정치에 무력하게 반항하다 스스로 세뇌되어 불꺼진 재처럼 죽음을 기다린다.
감시와 통제로부터 비롯되는 암울한 세기를 말하는 이 {1984년}은 현재로선 어느 부분은 맞고, 어느 면에서는 틀리다(Big brother뿐 아니라 수많은 Little brother의 태동이라는 점에서)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전체적인 뉘앙스는 대체적으로는 맞다. 통제할 수 없는 테크놀로지의 중앙집중화 그 어느 누구도 자유로 울 수 없는 감시체제, WASP의 불량 이념이 숨어있는 신자본주의체제, 그리고 초자유주의(Ultra-liberalism)를 앞세운 신제국주의 등으로 비롯되는 부정적 뉘앙스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본질적인 문제점을 인식도 못하거니와 반전의 기회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는 사회시스템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1984년]의 Big Brother를 배태할 수 있는 Big Mother, 즉 첨단기기나 인터넷 등에 의한 원격 감시장치에 사람들이 점차 감시와 통제를 비판적으로 보지 않게 될 것임을 시사(PRC:미사생활 권리정보센터)하고, 그럼으로써 더욱 둔감해지며, 이에 더하여 일상적 파시즘, 즉 통증조차 못 느끼는 전체주의적 폭력에 이제는 차라리 스스로 면역이 되어 가는 것이다.
금년도에는 남의 나라 일이라고만 여겼던 지체부자유자들에게 강제불임수술을 시술(유럽쪽에서는 일부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하였다고 한다. 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유전자의 완벽한 해독을 목표로 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완결되면 [유전자 계급 사회 : 보통이거나 열등의 유전자는 절멸하고 우등의 유전자만 보존되는 사태]의 도래 가능성은 디스토피아, 그 끔찍한 실낙원이 멀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는 미래에 출산통제와 그 범법자에게 신경칩을 장치하여 일상적 삶을 통제까지 하는 섬뜩한 장면을 보여준다.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그것이 그렇게 먼 과거의 일이기만 할까?
은행이건 관공서이건 아니면 달리는 국도건 머리를 들어 카메라를 쳐다보라! 의외로 많은 카메라가 당신을 반갑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컴퓨터를 작동하는 순간, 휴대폰을 거는 순간, 팩스를 보내는 순간, 카드결제를 하는 순간... 당신은 그 순간 전방위감시체제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톱니바퀴에 끼어 저항도 못하는 시민 챨리 채플린이 되는 것이다.
더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 세뇌되어 전기의자에서 다른 삶을 기다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자기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지금 당장 즉시적 대안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당신이 문학인이고 지식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는 있지는 않을까?
" 어떤 야만적인 것에 의해 우리 교육에서 단 하나의 학문만을 남기고 모두 추방해야 한다면 구제되어야 할 것은 바로 문학(文學)이다." 롤랑 바르트(1977)
개인들의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려는 경향이 강한 현대... 매조히즘적 안정성만을 강요하여 뿌리없는 개인들로 사회가 해체될 때 나타나는 전체주의, 사상(idea)의 로고스(logos)인 이데올르기(ideology)에 의해 지배받는 전체주의 (Totalitarianism)... 현상적으로 대중의 자발적이고도 열광적인 동의에 의한 것이란 점에서 물리적 강제를 수단으로 하는 권위주의와 구별되는 전체주의(파시즘, 나치즘, 스탈린-레닌주의의 초기형태)... 그것을 경찰 통제가 아닌, 점차로 중앙집중화되어가는 전방위감시체제와 결국에는 천박한 자본과 영합할 수밖에 없는 매스미디어 등을 포함한 문화권력에 의해 대중들 스스로 무력화되어 간다면, 그리고 그 한가운데 우리가 서있다면, 늦기는 하였지만 지금이야말로 부정과 철저한 비판의 정신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더하여 적극적 행동의 삶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특히 풍요로움을 누릴수록 전향하거나 침묵해버리는 [비겁한 지식인들]... 반성과 자기비판을 결여한 [사이비 지식인들]... 그럼으로써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 제국 건설에 일조를 하고 있는 모든 [우리]들에게 묻고 싶은 화두이기도 하다!
아울러, 진정 우리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더하여...
 
■. 나가면서...
당신이 우익이든 좌익이든 보수든 진보이든, 아니면 요사이 유행하는 제 3의 길을 걷든... 그도 아니라면 그 가치관이 상황에 따라 변하는 기회주의적 실용주의자든 여기서는 별 관심사항이 아니다. 다만 지금이 전통적 가치관의 구조적 파괴를 요구하는 미지의 페러다임 시대라는 것에 동의하냐는 것과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금세기에 저질러진 악행, 이를테면 히로시마의 원폭투하나 아유슈비츠의 가스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스탈린 체제하의 비밀숙청, 1980년대의 광주나 천안문광장사태, 금세기 마지막에 벌어지는 유고의 저 광란의 인종청소... 증오범죄 등은 한 개인의 반사회적 행태보다는 이성(理性:이데아, 절대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보내는 결정론적 역사주의 철학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이데올로기... 그 개인(인간성)을 전체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특정 이념이나 체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념과 체계로부터 파생되는 절대권력은 선(善)과 악(惡)을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도덕과 사회적 정의의 담론을 사회통합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개인의 일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한 바, 그리고 알아본 바와 같다.
이것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그것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의미를 갖는 계열화를 통해서-결정론적 역사주의와 세계사상사의 주류철학, 즉 플라톤, 데카르트, 헤겔, 칸트, 후설, 하이데거 등의 관념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동양의 유교나 성리학 등의 교조화된 담론이나 위장된 도그마일 수도 있다.
이 주류철학의 공통적 특징은 이데아(절대선의 다른 이름)를 유일한 본질로 인정하고, 실재하는 사물과 사건들을 [순간적]이고 [허상]적인 것으로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다른 편에 서있는 비주류 철학은 스토아 학파나 에피크루스학파,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송, 돌리죄, 그리고 주기론(主氣論) 등이 있을 수 있다.
어느 논자는 서양 철학사를 유일신 그리고 이성을 중시하는 헤브라이즘과 여러 신들로부터 배태되는 다양한 감정에의 헬레니즘과의 갈등과정이라고도 한다.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한다면, 동양 철학에서도 역시 이(理:절대적 이성)와 기(氣:보다 본능적 그리고 감성적)의 대립과정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 B. C. 5세기경에는 현실참여를 중시하였던 유교와 자연과의 합일을 주장하면서 무위(無爲)사상을 주장하였던 도교의 대립이 그랬다.
조선조에서는 주리론과 주기론이 그랬다.
그렇기는 하지만 승리자는 결국에는 항상 관념론과 합리론을 지향하는 전자(前者)이다. 거기에 명분이 있다고 인정을 하여 항상 위계의 환원성과 그 정당성을 부여받게 된다.
그런데 그 누가 이들에게 거기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그리고 그것을 선(善)이라고 이름 붙이는가? 그 누가 가장 혐오스러운 타성(외재성)에 젖어 들게 하는가?
혹시 무기력한 우리들은 아닌가... 방조하는, 그러면서 그저 즐기는 [비겁한 지식인들]이나 일반 대중은 아닌가... 사뭇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변증법적으로 보아 이성을 절대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기능적 도구로도 삼아, 자기의 감성(천박한 자본제의 속성으로부터 힘입은 말초적이고도 자극적인 본능은 배제하고...)이나 본능 저 밑까지 헤엄쳐, 정체성을 확보하고 그를 지향해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한번 아니면 끝까지 {부정변증법}에 동의할 것인가?
여기에서는 그런 차원에서 주로 비주류철학 입장에서의 접근을 시도하였다. 즉 사건이나 대상을 수단이 아닌 목적사항으로 설정을 해 [오현경 신드럼]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주로 현상학적이고 해체적인 방법을 빌어서 분석을 해보았다.
다시 말해 역사적 유래를 물으면서 시작하고 그 유래에 대한 반성에서 가장 급진적인 체계적 비판의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한가지 틀에 강제된 것을 거부하고 총체적 해석(이를테면 복잡성의 사유: 이 담론의 초고를 읽어본 한 시인은 너무 산만하다고 지적을 하였지만...)을 지향을 해보았다. 담론의 주제는 오현경이라는 소재를 빌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성(性)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나 전체주의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여성성이 될 수도 있고 아날로그 시대에서 흑백론만을 강요하는 디지틀 신테크놀르지에 의한 이분법적 가치관이나 암울한 미래(디스토피아)도 될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허망한 욕망에 영혼을 저당잡히고도 [자유인]이라는 환상 속에의 허상-이를테면 파우스트의 노비문서-을 뒤집어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작년에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파워엘리트 40인에게 보낸 글 {참을 수 없는 존재 혹은 돈의 가벼움}의 2부격인 이글은 어쩌면 당대를 움직이는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했는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이 짜집기(자족적이지 못한)된 글을 그 무엇으로 읽든 그리고 어떻게 읽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능력과 가치관이 갖는 변별력의 책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말미에 덧붙인다면, 이 세기말에 [죽은 시인의 사회]로의 진입 여부와 한국적 특성상, 필사적으로 이루어지는 종교적 도그마, 그리고 담론의 교조화의 책임여부도 어쩌면 우리 모두 일정부분 공유할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며,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아직도 답변을 거부하고 있는 당신에게 [에피쿠르스]의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당신은 그것(IT)을 알고 있었는가?
-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무능력하다.
당신은 그것을 방지하려고 하였지만 할 수 없는 것인가?
- 그렇다라도 당신은 무능력하다.
당신은 할 수 있지만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냐?
- 그렇다면 당신은 악의적(惡意的)이다.
당신은 할 수 있으며 또한 하려고도 하는가?
- 그런가! 그렇다면 [그것]은 대체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