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과 동화, 기행문

 송경종    이귀복    김은희(동화)    현종헌(기행문)

 

송 경 종

멍 석

요즘은 박물관에서도 보기 어려운 물건이지만 옛날에는 농가 어느 집을 가든지 봉당이나 토방 또는 헛간엔 몇 장씩 어김없이 쌓여있는 것이 멍석이었다. 멍석을 보면 그 집주인의 손재주를 알 수 있었다. 멍석이 고르고 탄탄하면 그 집 주인의 손 맵시는 알아주는 솜씨라고 믿어도 틀림없을 정도로 멍석만큼은 만든 사람의 손 맵시와 노력과 혼이 들어있는 물건이다.

멍석의 쓰임은 아주 많다. 곡식을 너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앉는 자리로도 쓰이고 바람막이 윷놀이 판 손님 맞는 잔치자리 비상시에는 물이나 불막이 방제도구로도 쓰였다. 햇볕이 무섭게 내리꽂는 무더운 여름날 정자나무 밑에 누군가가 펴놓은 멍석에는 누런 베잠방이의 동네 어른들이 느긋한 낮잠을 즐기는 자리가 되고, 동네를 지나는 나그네들의 쉼터도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추석이면 이집저집 마당에서 객지에 나갔던 정다운 사람들이 모처럼 서로 만나 막걸리 항아리를 옆에 끼고 '모야! 윷이야!' 윷놀이로 동네가 들썩거리는 곳에도 반드시 멍석이 깔려 있었다.

또 옛날에는 동네에서 향약을 어긴 징벌을 할 때에도 이 멍석이 쓰였다. 지은 죄는 밉지만 차마 아는 얼굴로 빤히 바라보며 징벌을 할 수 없으니 죄인을 멍석으로 말아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대작대기로 두들겨 패서 적당한 고통으로 죄를 뉘우치게 하되 큰 상처는 주지 않으려는 조상들의 인정 넘치는 슬기가 엿보이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대작대기를 사용한 것은 혹시 미운 감정을 가진 사람의 과격한 매질에 대한 부상을 예방하려는 듯하여 그 배려가 더욱 놀랍다.

그 외에도 멍석은 장판 대신 동네 사랑방에도 깔았고, 겨울에는 소의 옷으로 쓰이기도 해서 덕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던 지랄도 멍석 펴주니까 하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농촌의 많은 일들이 이 멍석 위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집에서는 여름날 저녁준비를 마당 한가운데 멍석을 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 옆에 모깃불을 피우고 부채를 갖다 놓으면 식구들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밀가루 팥죽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앉거나 누워서 영롱하게 반짝거리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별이 하나 떨어지면 누군가 한사람이 죽었다'는 신호이고, 소쩍새가 '소쩍다 소쩍다'하고 울면 풍년이 들고 '소쩍소쩍'하고 울면 흉년이 든다는 이야기도 그때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이며, 아버지가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가서 탄광에서 일하던 중 간신히 도망쳐 도둑 배를 타고 귀국해서 집에 오니 죽었다고 소문이 나 있더라는 이야기며 누구는 그때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서 머물러 지금은 부자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모두 이 멍석 위에서 들은 이야기이다.

이렇게 쓰임도 많았고 어렸을 적의 아련한 추억도 숱하게 담겨있는 멍석이 지금은 주인도 잃고 쓰임 자리도 잃어버려서 허물어져 가는 헛간 구석에서 돌보는 사람 없이 썩어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 인정머리 없는 요즘의 세태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휑하니 비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멍석을 보고 특별히 감상에 젖는 이유는, 아련한 어린 시절의 추억만이 아니다. 그것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수 천 번 수 만 번도 더했을 아버지의 손놀림과 그 촘촘한 틈새마다 배어있을 아버지의 눈물과 회한과 고뇌, 그리고 즐거움과 다정다감한 인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멍석은 여러 가닥의 새끼줄을 날로 하여 짚으로 촘촘히 엮어서 만든 자리이다. 멍석을 만들려면 우선 상당히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가난에 쪼들린 할아버지께 물려받은 세간 초가집에서는 멍석을 만들만한 공간이 없기에 한여름 장마철이 시작되면 아버지는 헛간에 앉아 그 쓰디쓴 엽연초를 신문지 자른 종이에 말아 피운 누런 담배연기를 내뿜어가면서 새끼를 꼬기 시작한다. 그때는 권련을 피우지 않으신 아버지가 가엾은 게 아니라 남 보기에 창피하게만 생각했던 것이 지금도 부끄럼에 몸이 떨리기도 한다.

며칠 동안 꼬아진 새끼를 들고 동각(동네 회관)으로 가서 새끼로 날줄을 날고 짚으로 씨줄을 엮어간다. 날줄의 새끼 사이사이를 두 세 가닥의 짚을 이어가며 규칙적으로 꼬아 틀면서 차례대로 엮어간다.

새끼의 굵기가 고르지 않거나 씨줄로 사용하는 지푸라기의 두께가 다르면 바탕 고운 멍석이 되지 않는다. 멍석은 곱고 튼실하게 엮어야겠기에 마른입에서 차진침을 발라 짚을 보드랍게 풀어가면서 새끼 사이사이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며 엮어야 한다. 가장자리까지 엮어 왔으면 테두리는 좀더 굵은 날줄에 위아래 두 가닥의 씨줄을 가늘게 새끼로 꼰 다음 다소곳이 돌려서 다시 반대 방향으로 엮어나가는 일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이렇게 비비고 꼬고 돌리고 엮는 행위가 적어도 20여 일이나 반복해야 한 장의 곱다스럼한 멍석이 태어나는 것이다. 평생을 농사일 때문에 굵고 억센 굳은살이 박혀 있는 손가락이지만 멍석을 엮으실 때만은 짚과 새끼줄에 닳아서 오히려 얇아진 손바닥이 빨갛게 혈색이 보인다.

아버지께서 멍석을 엮으실 때는 천하태평이시고 앉아 쉬는 시간도 많다. 몇몇 동네 어른들은 아버지의 멍석이 있는 대청 빈곳에 앉아서 다른 일을 하시기도 하고 어느 집 제사라도 있는 날이면 막걸리에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가 간다. 회관이 큰길을 접하고 있어서 지나는 사람마다 쉬어 가는 동각 대청에는 가끔 스님도 들려서 부처님 이야기도 해주고 목사님도 들려서 하나님 이야기도 들려주시면 하느님 말씀에도 귀를 기울이시고 부처님 이야기도 솔깃해 하시던 아버지였다.

윗동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비를 긋고 가라고 새끼줄을 한쪽으로 밀어두신다. 아픈 이를 손수 뽑아버린 탓으로 양 볼이 푹 들어간 사이로 드물게 자란 턱수염이 영락없이 문간 집 박서방 모습을 하신 아버지는 당신 자식 6남매로도 부족해서 남의 아이들까지도 끔찍이 예뻐해 주셔서 아이들은 아버지 멍석 위를 서슴없이 올라가서 돌고 뛰고 재주넘기를 한바탕 벌이고 가기도 한다. 멍석에는 가난에 찌들린 회한을 멍석 씨줄에 올올이 묻고 어머니의 잔소리를 날줄에 엮고 도시로 유학간 삼촌의 학비조달 고심까지 새겨져 있다.

문명의 발달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것은 당연히 변화되어야 하고 유지해야 할 것은 유지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멍석은 비닐 돗자리에 밀려나서 없어지고, 주관이 계산기에 밀려나고 일솜씨 좋은 사람도 컴퓨터에 밀려나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만의 정신 마저 변해서는 안 된다. 조상을 섬기고 부모를 효로 모시며 의리를 지키고 예절을 갖추고 사는 것은 우리가 유지하고 간직하고 물려주어야 할 중요한 문화요 우리만의 정신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안 계시는 고향 빈집에 멍석은 아버지의 영혼과 함께 헛간에 드러누운 체 말이 없다.

 

이 귀 복

성당뜰에 불던 바람

지난 시간에 대한 추억은 삶을 아름답게 한다. 그것이 사랑에 관한 추억이라면 살아가는 동안 은밀한 별 하나를 가슴에 묻고 사는 기쁨이 될 것이다.

평소에 나는 사랑의 추억으로 눈시울 애잔히 적시는 사람을 보면 늘 부러웠다. 돌아앉아 내 가슴자락을 아무리 헤쳐보아도 사람에 대한 추억 하나 없는 자신이 쓸쓸한 황무지 같게 느껴진다. 애틋한 그리움 대신 씁쓰레한 기억만이 뽀얀 먼지를 쓰고 있다가 부스스 얼굴을 내밀 뿐이다. 그래, 추억과 기억은 얼마나 다른가.

지난 사람에 관한 추억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에 대한 마무리를 잘 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기억은 전혀 다치지 않고 이별 후에도 그 기억을 보배로운 추억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 된다. 결국 사랑의 종착지는 이별이다. 더 엄밀히 말한다면 원인은 어찌되었던, 어느 한쪽의 등돌림이 아니겠는가. 그것을 흔히들 배신이라고 말하지만 그 배신에 모두 돌을 던질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가변의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삶에 있어서 '영원' 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도 없는 신기루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무엇이 영원한가를. 꼭 제행무상(諸行無常)을 말하지 않더라도 삼라만상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 이미 모순이다. 그러므로 지나간 사랑에 추억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사랑은 완성된 것이다.

고향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는 잊어버렸던 이름하나를 생각해 내곤 정신없이 웃었다. 정말 그의 존재는 세월따라 묻혀진 이름이었는데 오늘 한 친구를 통해 새삼 그를 떠올린 것이다.

작품집이 출판되어 가까운 친구들에게 보냈더니 격려와 축하를 해 주었다. 그 중 한 친구가 연락을 해 왔는데 모교 은사님과, 그 외에 자기가 꼭 보내고 싶은 곳이 있으니 여유 있게 책을 부치라고 한다. 나는 건성으로 내 책을 꼭 보낼 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 친구는 스스럼없이 말한다.

"누구긴 누구야, K지. 네 책을 읽다보니까 꼭 K, 그 사람에게 한 권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남편을 통하면 그의 주소는 쉽게 알 수 있거든."

사실 처음엔 K가 누군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가 너무 무시덤덤하게 말했기 때문도 있지만 그의 이름조차 잊을 만큼 흘러가 버린 시간 탓이기도 했다. 겨우 그를 가억하곤 나는 수화기를 들고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나 자신도 까맣게 잊은 이름을 친구를 통해 다시 듣게 되는 놀라움과 황당함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책을 보내라 말아라 어떤 얘기도 할 필요가 없음을 느꼈다. 이미 활자가 된 것은 내 것이 아니거니와 그가 읽던 말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내 마음이었다.

수화기를 놓고 돌아서니 왠지 공허하였다. 방안 가득 떠다니며

'너는 추억도 없지, 추억도 없지,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K.

그는 내 첫사랑의 이름이다. 모든 것, 참으로 오래 집착하는 성격임에도 나는 그를 참 쉽게도 지워버렸다. 그 덕분에 결혼생활이 힘들 때 가끔 첫사랑을 추억한다는 그 낭만은 처음부터 내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랑에 대한 추억 한 조각도 간직하지 못한 쓸쓸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K와 나는 어린 시절, 시골동네에서 오누이처럼 함께 자랐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그에게 영어를 배우면서 가끔 단어가 틀려 꿀밤도 맞았고 화가 나면 머스마야! 하고 대들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지내던 그는 청년이 되면서 우리 어머니의 일손을 도와 황토흙으로 부엌도 수리를 해 주고, 집안의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이웃사촌이 되었다. 어머니 역시 그를 챙겨주며 아들 대하듯 자연스러운 교류를 하였다. 그렇게 사춘기를 함께 보내며 그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을 때, 얼굴이 예쁜 그 언니를 질투도 하였으니 이성적인 감정이 함께 섞인 성장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시간이 흘러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가 우리가 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청혼해 왔다. 처음에 어머니는 떨떠름한 태도를 취하다가 끝내 반대하는 쪽으로 굳혔고, 그것은 K집안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서로의 집안을 너무 잘 아는 것이 문제였다. 그 좁은 시골에서 마주 보고 자랐으니 사돈의 팔촌까지 모르는 것이 없질 않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런 점이 편안했고, 그런 의미에서 서로 이해가 빠르리라 생각했는데 어른들은 그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쪽에서는 화복하지 못한 우리 부모님을 문제로 삼았을 것이고, 우리집에서 반대하는 이유도 간단치는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일이 잘 풀려 그에게 안주하길 원했다. 죽고 못사는 사랑은 아니었지만 시간따라 물 스미듯 든 정도 있거니와 그라면 우리집안의 모든 것을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 무렵 나는 집안에 머무는 것이 진저리가 쳐 질만큼 부모님의 불화가 싫었고, 그 탈출구로 결혼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난제를 무릅쓰고 그가 집안에 강경한 의사를 밝혔는지 그의 형님이 나의 학창시절의 이력이나 교우관계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가까운 친구들이 전해주었다. 나의 학창시절은 예나 지금이나 자긍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더욱 자세히 알길 바랬다. 그런 소식이 들린 얼마 후, 그는 나를 따라 영세입교했다. 성당에서 혼례식을 올리고 싶은 그의 마음을 받아들여 나는 그의 영세명을 고르기까지 했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이미 굳힌 것이었다. 그러나 우린 헤어졌다. 그 원인이 차라리 두 집안의 집요한 반대 때문이었다면 나는 지금도 그를 추억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가장 큰 원인이 되어 내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건 사건은 그가 생각하는 혼수를 내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던 그가, 그것도 경상도 남자인 그가 내게 은근히 요구하는 혼수는 너무나 황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 모든 것을 묻어버리기로 했다. 설사 우리 집안이 부유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순수한 소년 소녀고 자랐지만 현실 앞에선 아주 타산적인 청년이 되어있다는 걸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의 판단을 지금까지 현명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뿐 아니라 나는 딸아이를 결혼시킬 때에도 혼수를 바리바리 준비하며 실려보낼 생각은 전혀 없다. 그 문제는 딸아이 역시 확고하여 결혼에 대한 건강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헤어진 며칠 후, 거짓말처럼 그의 혼배미사를 알리는 공고가 성당 게시판에 붙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바램이 있었다면 게시판을 통하지 않고 직접 그의 입으로 결혼 소식을 듣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정도의 마무리는 기본적인 것이 아니었던가. 성당뜰을 불던 바람이 내 가슴을 마구 휩쓸고 있었다. 깊은 가을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며 잊어나갔다. 어린 날 이웃동네에 마실 갔다가 찐쌀을 가득 주머니에 얻어와서 내 손에 담아주던 기억도, 부모님이 원하지 않은 학생회장에 당선되어 혼이 날 때 풀죽은 나를 위해 돌담 위에 꽃다발을 놓아주던 기억까지도 그렇게 잊어 버렸다.

이별의 질은 그 사람 인격의 질과 비례한다. 이별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세기의 연인, 쇼팽과 죠르쥬 상드를 생각한다. 그들의 사랑의 배경이나 사랑의 행각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이 멋진 이별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은 9년간의 사랑을 마무리할 때 꽃마차를 타고 블로뉴 공원까지 가서 마지막 연주회를 하였다. 그것을 기념하여 블로뉴 공원에 세워진 영원한 연인상이 제작되기도 했다니 역시 그들은 멋진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별 뒤에도 공유할 추억이 있을 때 그 사랑은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가슴은 추억의 불모지이다.

나는 축복한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을. 그들이야말로 인격적인 마무리를 잘 했던 진정한 멋쟁이들이기 때문이다.

 

■ 창작동화

김 은 희

없어지는 놀이터

 

"랜드로 할까? 월드로 할까?"

"우리가 무르기 쉬운 걸로 하자."

"그럼 월드를 붙일까?"

"아니야, 롯데월드보다 에버랜드가 더 크잖아. 그러니까 이왕이면 큰 것으로 붙여 주자."

"그래, 좁쌀 같은 아저씨 생각하면 미웁지만, 랜드를 붙여 불러 주자."

"가락랜드!"

"무슨 큰 놀이 동산 이름 같다. 그럴 듯하다."

우리는 가락동에 삽니다. 집 앞 골목을 벗어나면 제법 높은 건물도 많고, 지하철역과 많은 차들이 다니는 큰길도 있는 서울에서도 변두리는 아닙니다. 바로 두 정거장만 가면 건물 안에 어드벤쳐라는 놀이 시설을 갖춘, 서울에서도 엄청 큰 백화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일이 바쁜 부모님을 졸라 그곳에 놀러 가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집 앞 작은 골목 어귀에는 백화점 놀이터보다 쉽게 갈수 있는 놀이터가 있습니다. 동전을 넣으면 기계에서 빠져 나오는 야구공을 칠 수 있는 코너, 축구공을 찰 수 있는 코너, 그 코너 철망 앞에는 아주 오래 된 전자 오락기 두 대. 떡판 같은 것을 힘껏 주먹으로 내지르면 점수가 올라가는 기계, 여러 개의 구멍 속에서 플라스틱 두더지가 튀어나오면 망치로 두드리는 기계 따위를 놓아 두고 장사하는 곳이 있습니다.

참, 그리고 나만한 6학년 남자아이 두세 명이 올라가 뛸 수 있는 작은 덤블링 기구가 두 개 더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놀이 시설이 아니고, 그 놀이 시설의 주인 아저씨랍니다. 우리는 그 아저씨를 '하마 아저씨'라 부릅니다.

지난 해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갈 때 보니 덤블링 기구 옆에 공원의 이동식 화장실보다 약간 큰 나무상자를 갖다 놓는 것을 보았는데, 학교에서 돌아오면서 보니 자그마한 문도 있고 그 문 위에 관리실이라 써 붙여 놓았습니다. 문 맞은편에는 내 책받침보다 조금 큰 유리창도 있었습니다.

"기웅아, 우습다. 큰 놀이 동산도 아닌데 무슨 관리실이란다."

우리는 아주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저 뚱뚱한 아저씨가 저 속에 들어가 있다가는 숨이 막히겠다. 그치?"

"저 아저씨는 답답한 것도 모를 거야. 돈만 많이 벌면 되니까. 난 저 아저씨 웃지도 않고, 늘 화난 것처럼 인상 쓰고 있어서 싫어."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우리가 갈 수 있는 하나밖에 없는 놀이터잖아."

"하긴, 그래."

그렇습니다. 큰길 건너 백제 고분 옆 어린이 놀이터는 1∼2학년 어린이나 유치원 아이들이 놀아야지, 우리가 가면 할머니들께서 우리를 보고 다 큰 것들이 아이들 못 놀게 그런다고 쫓아냅니다. 또, 수업이 끝난 오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싶어도 우리 학교 야구부 훈련하느라 운동장을 다 차지하고 있어서 뛰어놀 수가 없습니다.

학교 공부가 끝난 후, 학원에 갔다가 우리 뒷집에 사는 상민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이 가락랜드에서 덤블링을 타기도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그것을 못 타게 합니다. 골이 울려 머리가 멍청해져 공부를 못 하면 나중에 서울대학에 들어 갈 수가 없다고 말리시지만, 뛰어오르면서 재주를 발딱 넘으면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하마 아저씨 지독한 구두쇠다. 500원어치 10분에서 딱 1분도 더 못 타게 해."

"그래, 언젠가 유치원 꼬마들이 우리 옆 칸에서 신나게 덤블링 타는데 지키고 서 있었어. 타려고 기다리는 다른 아이들도 없는데도 이제 2분 남았다고 소리치는 그 하마 아저씨가 미웁다는 생각이 들었어."

"스크루지 영감과 친적인가 봐."

"아니야, 스크루지보다 더할 거야."

재작년에는 동전 100원을 넣으면 한참 할 수 있는 오래 된 전자 게임기도 가끔 해 보았고, 야구공 치기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들어서부터 실업자가 많이 늘었다고 하더니 정말 어른들도 우리처럼 갈 곳이 없어졌는지 야구공 치는 칸에 늘 어른들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또 어떤 어른은 몹시 화가 난 얼굴로 두더지 머리 때리기를 정신없이 합니다. 주먹으로 내지르면 점수가 올라가는 떡판 같은 것을 사정없이 치는 어른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덤블링이나 타기로 하였습니다.

"아저씨, 우리 둘이 500원밖에 없는데 둘이서 10분 타면 안돼요?"

"그런 계산이 어딨어? 규칙대로 둘이 올라가 5분만 타!"

"기계를 돌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뛰는 건데 10분 타게 해 주세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난 땅 퍼서 먹고 사냐?"

"아저씨는 스크루지보다 더해요."

"이 녀석아! 스크루우지가 뭐 하는 것인지 몰라도 비싼 땅 빌려 땅세도 내야지. 밥도 먹고 살아야지……. 나도 힘들다."

'하마 아저씨 무식해. 스크루지가 누군지도 몰라.'

상민이가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립니다.

"자아 시이작! 5분이다. 그리고 살살 뛰어! 천이 뜯어질지 모르니까!"

우리는 정확하게 5분 만에 울리는 하마 아저씨의 호루라기 소리에 덤블링에서 내려왔습니다.

"기웅아, 우리 이따 밤에 저 아저씨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을 때 와서 공짜로 타 보자."

"그래도 될까?"

"뭐 어때. 전기가 드는 것도 아닌데."

"그러자! 몇 시에 나올까?"

밤 11시가 넘어 만난 상민이와 나는, 가락랜드 덤블링을 아주 많이 신나게 탔습니다.

그런데 일이 났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서 보니, 관리실이라 하는 유리창 밑에 큰 종이가 붙어 있었습니다.

밤에 몰래 덤블린 타는 사람

잡아주면 5만원 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빨리 학교로 뛰어와 상민이를 찾았습니다.

"너, 가락랜드에 그 아저씨 써 붙여 놓은 것 보았어?"

"으응, 걱정이 되지만 우린 줄 모를 거야. 가만히 있어 보자."

"괜찮을까?"

"뭐, 우리가 망가뜨린 것도 없잖아. 그런데, 난 놀라기도 했지만 우스웠어."

"왜?"

"글씨도 틀리고 삐뚤거리게 써 놓았잖아. 지나가는 중학생 누나들도 킥킥거리면서, 알아도 안 잡아 주겠다고 그러더라."

"……."

'그리고, 그것 좀 탔는데 현상금을 5만원씩이나 준다니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며칠 동안 학교에 오고갈 때, 가락랜드 앞을 살금살금 눈치를 보며 지나쳐 다녔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우리가 탔다고 하면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그 큰 손으로 때릴 것 같아 그냥 말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마 아저씨도 우리를 보아도 잡지 않는 것을 보니 우리가 몰래 덤블링을 탄 것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 후, 그 곳에 더 큰 글씨로 다른 종이가 붙었습니다.

어젯밤에 몰래 덤블린타고

우리 덤블링천 찌져 노은 사람

잡아주면 10만원 줌!

상민이를 찾아갔습니다.

"너, 어젯밤에 가락랜드 덤블링 몰래 탔어?"

"아니야, 난 너한테 물어 보려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나도 아니야."

"그럼 우리가 그 때 탄 것처럼 밤에 덤블링 몰래 타는 사람이 또 있나 보다."

하마 아저씨는 밤에 몰래 덤블링 탄 사람을 찾지 못하였나 봅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종이가 가락랜드 관리실 유리창 밑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마 아저씨는 덤블링 밖에다 내키의 세 배는 됨직한 높은 철망을 치더니 두 군데 문을 해 달고서 커다란 열쇠도 걸어 놓았습니다.

스크루지 같은 하마 아저씨가 미워도, 마땅히 놀러갈 곳이 없는 우리는 우리가 이름지어 준 가락랜드의 덤도 없는 덤블링을 타러 다녔습니다. 오래 전 밤에 한 번 몰래 탄 일 때문에 500원 내고 10분도 안 타고 내려온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던 올 봄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 보니 가락랜드가 헐리고 있었습니다. 하마 아저씨는 아주 기운이 없는 모습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도 나오셔서 철망을 걷어 내는 크레인을 구경하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 왜 이것을 부수는 거예요?"

"쯧! 쯧! 안되었어. 놀이터 주인이 땅세를 밀려 땅을 비워 주어야 된다나 보더라."

"그럼 이 놀이터 없어지는 거예요?"

"돈 많은 사람한테 이 땅이 팔려서, 여기에 높은 건물을 짓는다더라."

할아버지께서 안되었다는 모습으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공 치는 소리, 오락기 소리 안 나서 좋지만 저 사람이 안됐어. 마누라도 없이 자식들 셋씩이나 키우며, 아픈 아들 병원비 대면서 고생했는데……."

"할아버지,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구두쇠라고 미워했어요."

"사람을 함부로 미워하면 안 된다. 저 기계들 팔아 아픈 아들 데리고 충청도 시골에 내려가 농사짓고 산다더구나."

할아버지께서는 그 하마 아저씨를 몹시 측은해하셨습니다.

음악책에 나온 노래처럼 마음이 답답할 때 올라갈 뒷산이 없는 우리는, 이럴 때 덤블링을 하면 하늘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시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도 마음이 답답하면 노래방에 가기도 하고, 두더지 때리기도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와서 놀 수 있었고 이름까지 붙여 준 가락랜드가 없어져. 그나마 놀러갈 곳이 없는 상민이와 나는 가끔 골목길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마 아저씨를 이야기합니다.

 

 

■ 기행문

현 종 헌

-충격의 일본 배낭여행기

일 본 을 찾 아 서 -- 여행은 서서히 편견을 없애주는 것 --

 

시모노세키 항(下關港)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내 심장 속에선 현해탄을 건널 때보다 더 크게 떨며 몰려든 핏방울들이 솟구치며 파도치고 있었다. 그 떨림은 귀국선에서 내릴 때까지 잠시도 멈출 줄 몰랐다.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같은 직장 동료들과 배낭 하나씩 둘러매고 일본 열도를 휘젓고 다닌 지난 7박 8일 간(1998. 1/5 - 1/12)의 여정은 그야말로 평생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 여행이었다.

하늘은 내내 맑게 개어 있었다. 우리 네 명의 표정도 밝았다.

'이 나이에 해외 배낭여행이라니' 하며 처음엔 적이 망설였으나 호화 유람선 같은 부관페리호에 몸을 싣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IMF 체제 시대에 교사가 외국이나 돌아다니며 외화를 낭비한다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죄책감도 금방 잊을 수 있었다. 첫 해외나들이라는 점에서 무척 들뜨기도 했지만, 어느 나라보다 먼저 알아야 할 이웃 일본을 제주도 왕복비만큼의 저렴한 비용으로 알차게 다녀왔다는 데 대해 오히려 보람을 느꼈다.

'일본' 하면, 우리는 우선 '가깝고도 먼 나라'와 '경제대국'이라는 수식어를 습관적으로 붙인다. 그리고 나서 그 이면의 세계를 찬찬히 헤집고 들어간다.

확실히 간접경험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아직까지 100볼트를 쓰는 전기 실태의 사소한 것에서부터 거리를 떠다니는 사무라이 후손들의 무표정한 모습을 보지 않고는 일본을 피부로 느낄 수 없다. 새로운 문화 창조란 직접 몸과 몸이 만나 부대끼는 데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문화 충돌 여행을 통해 나 개인적으로 느낀 '일본 문화의 장단점 3가지'부터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예전의 내 편견으로 얼룩졌던 장점 첫 번째는, 일본은 우수한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과거사는 결코 우리보다 뒤지지 않았다.

조선 영조 때 일본을 둘러보고 쓴 김인겸의 장편기행가사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는 일본인들을 '족바리 운운' 하며 꽤나 비하시키고 있다. 임진왜란 일어나기 전 두 명의 사신이 정탐 목적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힘이 넘쳐 흐르는 일본의 실체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오늘날 교육적 측면에서조차 그 사실을 피교육자들에게 바르게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이데올로기 강화 목적으로 북한의 실상을 왜곡시키는 것과 같다.

도쿄의 교코(皇居), 오사카의 오사카 성(大板城), 가마쿠라(鎌倉)의 막부(幕府) 터, 교토의 히가시혼간지(東大願寺) 및 나라의 고후쿠지 오중탑(興福寺五重塔)과 도다이지(東大寺) 내 본당(金堂)·청동불상 등을 보면 일본의 고대 문화가 얼마나 웅대하고 찬연했었는지 찾는 이들로 하여금 절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1397년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지은 쌀 1백만 석 짜리 금각(金閣) 앞에 서면 눈이 부셔 가만히 서 있어야만 한다.

나머지 두 가지 장점은,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는 '질서 의식'과 '친절함'에 있다.

거리의 깨끗함과 줄 잘 서는 질서 의식은 더도 덜도 말고 눈에 보이는 바 그대로다. 사람들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을 보노라면 초등학교 바른생활 교과서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지하철 역사에서는 허리 꾸부정한 노인네들이 세제를 묻혀가면서 있는 힘 다해 구석구석 닦아낸다. 도쿄에서 어떤 화물차가 모래를 좀 흘리며 지나가자 청소하는 한 사무실 경비원이 그 뒤를 따라가며 알갱이 한 알까지 다 쓸어냈다. 기차 안에 빈 자리가 나 있어도 결벽증 환자처럼 자기 지정석 아니면 가 앉지 않는다. 아무리 지루한 여행일지라도 기차나 배 안에서 깔깔거리면서 고스톱판 벌이는 사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피해주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아온 결과인 듯 했다.

도쿄 역에 이른 새벽에 도착하여 오갈 데가 없자 사우나탕에 가서 피로를 풀기로 했다. 전철역 세 정거장 가는 데 택시비가 2만원 넘게 나와 우리는 어리둥절해 하면서 바가지 쓴 게 아닌가 하고 기사의 양심을 의심했다. 그러나 일본을 수 차례 다녀온 바 있는 일행 중의 일본어 교사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했다. 어떤 곳에서건 그는 일본인을 신임했다. 일본인들과 부딪칠 때마다 한 젊은 일본아 교사를 사로잡은 원인이 바로 이런 곳에 있었구나, 하고 나는 내심 몇번이나 감탄했다.

'일본 이야기'라는 책 속에서 일본을 알면 알수록 친일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했던 고려대 이현구 교수의 말 뜻을 실감할 수 있었다.

국내 유니텔 통신에서 '도쿄 디즈니의 청결함'에 대해 토론 벌인 적이 있었다. 먼저 주제를 올린 자가 일본의 깨끗함을 칭송했고, 이어 반론자는 돈 뿌려 청소부를 고용하니까 그만큼 깨끗한 거지 쓰레기 버리고 싶은 사람의 심리란 세계 어느나라 사람이나 같다고 주장했다.

물론 쌍방이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인이 질서의식 강하다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오일 달러 넘치는 중동지역(中東地域) 사람들에게 공부하라고 아무리 대학 정문 안으로 떠밀어 넣어도 듣지 않는 걸 보면 밑바탕에 깔린 근본적인 자세는 쉬 변할 수가 없다.

거기다 친절함까지 가세하면 먼 타향에서 온 이방인들은 한겨울임에도 온몸이 푸근해지면서 간이 살살 녹아내린다. 시모노세키 항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돌아갈 때까지 '감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을 귀따갑게 듣는다. 길 가리켜 줄 때도 턱으로 대충 허공을 쿡쿡 쑤셔대는 일이 없다. 가던 길 멈추고 일부러 멀리까지 쫓아와 골목골목 공손히 안내한다.

그때마다 나는 요 근래 국내 모 방송국 뉴스 시간에 방영한 김포공항 안내원들의 무뚝뚝한 표정 장면을 연상하며 낯을 붉혔다.

오늘날 세계 경제를 제패한 일본의 저력이 결코 기적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장면들이다. 그러나 꼭 바람직한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그늘진 세계도 깔려 있다.

'지나친 개인주의'와 그로 인한 '인간관계 단절', 그리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섹스산업의 번창'은 그들의 흔적을 뒤따라가는 처지의 우리들에게 많은 걸 되짚어보게 한다.

지나친 개인주의가 각 개인을 소외감으로 몰고 간다. '나라는 잘 사는데 개인은 불행하다'라는 말의 속뜻을 실감할 수 있다. 하루의 일상 중에서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에도 별로 말이 없다. 역사(驛舍) 부근에서 우동 한 그릇을 번개불에 콩 궈 먹듯 후닥닥 해치우고 발걸음을 재게 옮기거나, 달리는 전철 안에서 천연덕스레 도시락(벤토)을 꺼내 혼자 우물우물 씹어 삼키는 광경은 삶의 처절한 전쟁터에서 한 병사가 전투를 치르다 잠깐 휴식하고 있는 것 같아 몹시 살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곳곳에 널려 있는 빠칭코 건물들은 또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들은 퇴근 후에도 여간해서 벗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혼자 빠칭코 기계 앞에 앉아 코인을 가득 쌓아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게임에 몰두하는 일이야말로 훌륭한 취미 생활 중의 하나다. 그런 장소라면 한국인들은 돈을 따기 위해 눈을 휘번득이겠지만, 일본인들은 숨가빴던 하루를 정리하는 자세로 성직자처럼 몸을 가지런히 세운 채 의자 깊숙히 파묻는다.

술집에서도 여러 번 봤지만 그들은 만취하는 일이 없으며, 남들에게 자기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혼자 조용히 즐기다가 안개처럼 사라진다. 얄미울 정도로 다투는 사람 하나 없다.

따라서, 이런 철저한 경제적 동물 근성으로 인하여 따뜻한 인간관계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걸 칼로 두부 자르듯이 돈으로만 계산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선은 한치 오차없이 아주 정확하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김치 좀 더 주세요' 했다간 망신 당한다. 반드시 돈으로 따져 '김치 얼마치 더 주세요' 해야 한다. 신사(神社)에서 소원을 빌 때도 결혼은 얼마, 교통안전 기원은 얼마, 사업운을 바랄 때는 얼마, 이런 식으로 각기 금액을 따져 바친다. 우리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 가지 않을 부분들이다.

혼자 있다는 게 어떤 창의력을 향상시켜 문명 발전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인간 관계를 단절시켜버려 휴머니즘적인 삶 자체를 파괴시키기도 한다.

끝으로 한가지 또 하나의 부정적인 면은, 섹스산업의 번창함에 있다. 소문 듣던 그대로 그 분야에 대해선 가히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플레이보이'나 '팬트하우스' 수준의 여자 누드 사진이 눈요기감으로 끼어 거침없이 팔리고 있는 가판대의 주간지들, 대로변에 벌거벗은 남녀의 간판이 대수롭지 않게 걸린 성인용 극장들, 그리고 번잡한 거리 뒷골목에 숨어 있다 그림자처럼 기습해오는 온갖 섹스에 관한 유혹들이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한 중년 사내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었다. 도쿄의 세이부 신주쿠역(西部 新宿驛) 주변 가부키초(歌舞伎町) 거리는 홍등가(紅燈街)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 곳이다.

작년에 '빨간 마후라'라는 청소년들의 성행위 장면을 담은 비디오가 한동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 정도 갖고 화젯거리가 되지 못하는 듯 했다.

청소년에 대한 성적 가해 행위도 스스럼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섹스에 관한 기능과 지혜가 발휘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여자와 2세들이 불쌍했다.

이런 토양 위에서 일본이 과연 언제까지 번창해 나갈 것인가가 궁금했다. 아직도 자본주의는 실험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일본 물가가 살인적이라지만 이런 귀중한 시간에 돈을 아꼈다간 되레 손해볼 것 같다는 판단에 마음 속에 장치된 계산대와 적당한 선에서 합의 보며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덕분에, 그밖에도 많은 걸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짤막하게 요약·정리해 보면,

◆ 한국과의 물가 차이는 대략 세 배 정도 되는데, 음식값은 2배, 옷값과 가전제품은 1.5-2배, 교통비는 6-10배 정도로 품목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 도시가 철로를 중심으로 발달돼 있는 듯 하다. 시모노세키에서 도쿄까지 가는 철로 주변에는 15평 남짓한 가옥들이 가로수처럼 줄느런히 늘어서 있다. 다다미집이라 불리는 전통가옥이 의외로 많다. 지진에 대비한 구조 형태라고 한다. 도시에 이를수록 철로에 아주 가까이 인접해 집이 붙어 있다. 그리고 큰 도시에는 거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 농지 형태가 매우 비합리적으로 분할돼 있었고, 농가 규모는 적어 보였다. 따라서 농산물은 경쟁력이 없을 것이다. 지난 우루과이 라운드 때 한국과 일본이 손잡고 미국의 쌀개방 압력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닛본도(日本刀)를 비스듬히 뉘어놓은 듯 남북으로 길게 뻗은 나라. 지리적 여건이 도무지 경제 발전에 기여할 것 같지 않은데도 거침없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한마디로, 국운(國運)이 펄펄 넘친다는 얘기다.

◆ 시민들의 의상이 검소해 보였다. 흐트러짐도 없었다. 단정하고 깔끔했다. 여대생들조차 낭비하는 기색이 없다. 한겨울임에도 모피 걸친 여자 한 명 없는 걸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남학생들의 까만 교모와 교복을 보며 난 문득 고교시절의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 것과 꼭 빼닮은 후크·하얀 카라, 그리고 뺏지와 교표 위치까지 20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앞으로 다가왔다. 빡빡머리만 틀렸다. 그러나 우리 교복이 일본에서 건너온 것임을 깨닫곤 혼자 피식 웃었다.

◆ 여고생들의 발목 토시가 무척 신기해 보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유행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다. 하이틴 잡지를 통해 무작정 따라 하는 것이다. 자전거로 통학하는 습관이나 좀 배울 일이지, 뽸뽸….

◆ 교토 도심을 관통해 흐르는 가모가와(鴨川) 강물이 다리 난간 위에서 배낭 쟈크가 열려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맑다. 1급수 수준이라고 한다. 서울시와 과천시가 본받았다고 하는 '양재천 살리기 운동'의 현장인 듯 했다. 시내 가장자리의 시멘트를 헐어낸 다음 그 자리에 흙을 채워 갈대를 심었다. 갈대는 물 속의 공해 요소를 빨아들인다고 한다. 역시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나 보다.

◆ 일본은 거대한 우주선. 그 속의 교통망은 우주선 속에 깔린 미세한 전자회로처럼 복잡하다. 마치 일본의 과학 기술을 집약해 놓은 듯 하다. 대중교통망이 사방팔방으로 뻗어 있어서인지 대도시 한복판에서도 여간해서 길이 막히지 않는다. 도로 밑엔 전열선이 깔려져 있어 폭설이 내려도 빙판이 생기지 않는다. 배수로 시설 또한 잘 돼 있어 홍수에도 도로가 침수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좁은 일방통행로까지 신호등이 있다. 문득, 평균 시속 20Km를 못 내면서도 뒤죽박죽인 서울 거리가 생각났다.

◆ 주차 위반 범칙금이 우리나라는 6만원인데 일본은 53,000원이다. 과연 우리나라가 벌금공화국이란 오명을 들을 만도 하다.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도 없지만 스티커 발부하는 장면도 목격할 수 없었다. 수많은 명목으로 걷히는 조국의 그 범칙금과 벌금들, 다 어디로 새나가는 걸까.

◆ 자동차 운전석이 우리와 반대로 오른쪽에 있다. 옛날 사무라이들은 칼을 왼쪽에 찬다. 적과 조우(遭遇)했을 때 쉽게 칼을 빼기 위해 좌측통행을 했고, 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라고 했다. 영국·일본 같은 섬나라들이 좌측 통행을 하는데, 이런 나라들이 침략 근성이 돋보인다.

◆ 와세다 대학신문 1998년 12월 17일자 1면 머릿기사. "새로운 세계대전의 위기가 고조돼 있다" 밑에 '미·일, 중·러 간의 대립 격화로 인한 내쇼날리즘(國粹主義)'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상아탑에 감도는 전쟁의 기운, 여차하면 한판 붙겠다는 전의(戰意)에 불타는 투지, 일본 최고의 엘리트 대학 신문에 실린 이 기사를 보며 등골이 오싹해져왔다.

◆ 일본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처럼 여겨진다. 온 조선 백성을 신음케 했던 임진왜란 정도는 비와코(琵琶湖) 호수에 창포돛단배 지나간 듯 조그만 사건에 불과하다.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린 다카우지(足利尊氏;1304-1358) 같은 이는 일생의 반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에도 시대(江戶時代) 250여 년을 제외하면 역사의 거의 대부분이 전쟁의 피비린내로 뒤덮여 있다. 그래서 전구(戰具) 문화가 매우 발달돼 있나 보다. 박물관에 가 보면 갓 제작해 놓은 듯한 예리한 닛본도와 투구·창 같은 것들이 섬뜩할 정도의 빛을 발하며 길게 진열돼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여자가 역사 전면에 나섰던 경우를 못 봤다.

◆ 동경국립박물관에서 난 눈이 땡그래졌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아름다운 무늬의 토기들이 기원전 10,000년 전의 것이라고 했다. 1946년 굼마현(群馬顯단) 이와주쿠(岩宿군)의 홍적세 지층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는 뗀석기의 정교한 문양을 보노라면 의아심으로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왕검 시대보다 무려 7,000년이나 앞선 화려한 문화, 그 부분에 관한 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 그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 오사카 성과 도쿄의 교코를 보곤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가 한양(漢陽)을 접수하곤 당황했다는 말을 실감했다. 두 성에는 해자(垓字 ;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을 빙 둘러 만든 연못)가 두 겹 세 겹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고, 성 안에도 비밀스런 요새가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성에 모든 걸 걸었고, 성이 함락되는 즉시 백기를 든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삼별초의 난, 왕의 강화도 몽진·갑오동학농민전쟁·상해임시정부에 의한 광복군 투쟁에서 보듯 온 백성이 쓰러지지 않는 한 그건 항복이 아니다. 잠시 머리 조아려 굴복했을 뿐이다.

◆ 땅값 비싼 도쿄 한복판에 30여 만 평을 깔고 누워 있는 거대한 황거(皇居) 교코. 영국에서처럼 왕실이 국민의 혈세 깎아 먹는다며 불평 한 마디 나올 법도 한데, 희한할 정도로 잠잠하다.

◆ 기원전 660년 제1대 진무천황(神武天皇)부터 아키히토(明仁) 천황까지 125대째 내려오는 일황가(日皇家)의 계보는(아무리 제33대 스이코(推古) 천황 이전은 믿을 수 없다 할지라도) 세계사의 한 미스테리처럼 보인다.

◆ 나 혼자 생각한 일본 현대사의 천운(天運) 세 가지 ; ① 메이지 유신(明治維新)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개혁 성공(청일·러일 전쟁 승리의 계기), ② 제2차세계대전 후 미국에게 예속된 점(패전국으로서 남북 분단을 모면했고,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 실현), ③ 6·25전쟁에 의한 경제 특수(경제 부흥의 직접적 계기).

◆ 양 국민의 외래문화 수용의 기질적(氣質的) 특징을 잘 드러낸 부분 ; 일본에서 십자가 걸린 교회 찾기가 한국에서 이슬람 사원 찾기와 같다.(그러나 나는 아직까지도, 그토록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 정권을 공포에 사로잡게 했던 카톨릭 세력이 사라져버린 데 대해 궁금증을 풀지 못한다)

◆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기독교인 수가 70%로 일본 내에서 가장 높은 비율이라고 한다. 기독교인들 말에 의하면, 하느님은 인간을 시험할 때 먼저 자기 편에게 시련을 준다고 한다.

◆ 일본인들의 영어 실력은 세계 120위 권이란 통계 수치가 말해주듯 교육 효과면에 있어서 우리나라보다 못해 보였다. 우에노 공원(上野公園) 가는 길에 한 안내자가 맥도날드를 매꾸도나루도라고 발음해서 나를 한동안 소리없이 웃겼다. 영어를 어쩔 수 없이 세계 공용어로 인정해야 하는 게 대세라면, 일본인들의 영어에 대한 고뇌는 일본어 음운체계가 바뀌지 않는 한 숙명적인 과제처럼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도쿄 시내의 어느 차량 정비업소 앞을 지나가다가 "빠꾸" "오라이" 하는 종업원의 소리를 들었을 때 난 잠깐 서울 거리에 와 있다고 착각했다. 그러다가 '민방위교육장(民防衛敎育場), 황색 실선(黃色實線), 주택부금(住宅賦金)'이니 하는 용어와 어린이 만화영화 '마징가 제트' 상표, 저녁 때 한국 방송과 거의 닮은 오락 프로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과거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중대한 의문점 한 가지. 역사적으로 볼 때 국가 간의 전쟁이란 반드시 어떤 '뜨거운 감자'가 있어야 하는데, 왜 일본은 아무런 트러블 없는 조선을 향해 칼을 겨누었을까.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내치(內治)에도 힘겨운 상태였는데….

이런 것들을 느끼며 나는 일본·일본인·일본문화·일본경제에 대해 하염없이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특히 시내 곳곳에 붙어 있는 스미토모은행(住友銀行)의 주택융자금 2% 홍보용 전단지는 한 나라밖 떠돌이를 무척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주택융자 금리가 13% 선이기 때문이다. 너무 현격한 차이 때문에 잠깐 '돈놀이해 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나 같은 범인(凡人)의 눈에도 선뜻 그게 짚이는데, 날고 기는 사람들에게야 오죽할라고.

국내 정·재계 거물급들이 눈짓만 까딱 하면 이자놀이할 수 있는 일에 가만히 팔짱끼고 앉아 있었을 턱이 없다. 그래서 과거 김영삼 정권 때 금리를 선진국 수준인 6% 대까지 낮춘다고 했었구나, 생각했다. 그때 난 그게 과소비를 부추기는 엉터리 정책이라고 정부를 맹비난했었다. 그리고 지금의 IMF 체제에서 선진국의 '금융 지원'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언젠가 갚을 돈이면 '지원'이 아니라 '차용'이라고 해야 한다며 반발했는데, 이제서야 그 내막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 일정은 총 8일이었는데, 4일은 이동, 4일은 정착해서 지냈다. 이동 경로는 크게, 성남(1월 5일) - 부산(5일) - 시모노세키(6일) - 오사카(6-7일) - 나라(7일) - 교토(7일) - 도쿄(8-9일)와 그 역순(逆順)이다. JR선을 이용한 시모노세키 - 오사카 구간은, 갈 때는 이와쿠니(岩國) - 오카야마(岡山) - 히메지(姬路), 올 때는 카고가와(加古川) - 오카야마 - 히로시마(廣島)를 경유했다.

정착한 4일은 대강 오사카에서 하루, 나라·교토에서 하루, 도쿄에서 이틀 간 머물렀다. 7박 중 4일은 이동 중에 선박과 열차 속에서 잤고, 나머지 3일은 이틀 오사카, 하루는 도쿄의 호텔에서 숙박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시모노세키) - 평양(오사카) - 영변(나라) - 신의주(교토) - 청진(동경)쯤 왕복한 걸로 생각하면 된다.

이번 여행 중의 하일라이트는 교토의 동쪽 시가지 전체를 도보로 여행했다는 점이다. 그때 우리는 어느 한 부분 의견 엇갈리는 일 없이 히가시혼간지 절, 교토 고엔(京都御苑) 공원과 교토 고쇼(京都御所), 교토대학, 철학자의 길,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대중사우나탕, 가모가와 강변도로를 입안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걸어다녔다. '한국의 경주'로 곧잘 비유되는 이곳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년부터 막부시대(幕府時代)를 거쳐 1867년 에도시대가 망할 때까지의 수도(首都)로서 1,100여 년 세월의 정취가 서려 있는 만큼 시내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으로 눈만 뜨면 배움의 장이 펼쳐진다.

컴퓨터·일본어·국사·국어 교사로 짜여진 우리 일행의 개성과 조화가 한껏 드러나며, 일본 여행 일정의 마무리 부분을 백미로 장식하게 된 부분이다. 어느 일본여행 가이드 책자에서 15박, 14박, 13박 줄여가면서 어느 곳 어느 곳을 다녀보라고 추천하다가 짤막한 하루 여행이라면 교토를 권하겠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감미롭게 향기가 우러나오는 고도(古都)에서 우리는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추억의 한 페이지를 새겨놓았던 것이다.

아마, 내 기억의 뇌리 속에서는 신주쿠(新宿)의 밤거리 배회, 야간 열차 '문라이트 나가라'(달빛과 더불어)를 기다리며 요코하마(橫浜) 부둣가에서 찬바람 속에 5시간 여 소주 마시던 일, 부관페리호 갑판에서 물보라를 뺨에 맞으며 시를 흥얼거리던 일, 이런 식으로 차츰차츰 추억이 소멸돼 가다가, 맨 마지막으로 눈감는 순간에야 교토의 도보여행 장면이 사라지게 되리라.

이번 해외배낭여행은 서울 모 여행사의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가이드 없이, 부관페리호 왕복권, 5일간의 JR 패스 사용권, 호텔 3일 숙박권, 이런 조건으로 399,000원을 들여 다녀왔다. 비자 인터뷰할 때까지도 사기당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로 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신력을 심어준 신문기사만 없었다면 선뜻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작년 여름엔 650여 명이 다녀왔다고 했다. 이번 겨울방학 기간 중에도 수 차례 반복됐는데, 우리팀엔 80명 가량이 동행했다. 남녀노소가 섞여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초등학교 6학년생 두 명이 돋보였다. 서로 낯모르는 사이였는데, 도중에 사귀어 같이 잘 어울려 다녔다. 한 애는 아빠가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연구원이었다. 13살짜리 어린애를 이국땅 가이드없는 여행에 던져두는 부모의 모험심이 대단해 보였다.

도쿄를 떠나는 날엔 눈이 내렸다. 나고야(名古屋)에 이를 때까지 밤새 내려 세상을 하얗게 물들였다. 나는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고등학교 때 읽었던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교토에서 하룻동안 도보 여행을 마치고 오사카로 향했다. 하루 숙박하고, 새벽 5시 27분 차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내 생애에서 단숨에 가장 오랜 시간·먼 거리를 승용차 운전했고, 기차와 배를 탔다. 그리고 군대 제대한 이래 가장 많이 걸어다녔다. 몸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를 깡그리 밖으로 끄집어내게 한 지친 여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한 마디로 요약하여 '충격 속에 보낸 날들'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거리가 깨끗하고 하늘에 공해의 찌꺼기 한 점 없는지, 사람들은 왜 그리 조용조용하고 일란성 쌍둥이처럼 질서있게 움직이는지, 도대체 비슷한 환경 속에 살면서 우리나라와 왜 그런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 민족의 피가 요만큼도 섞인 것 같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호전적이면서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준 나라가 바로 바다 건너편에서 저렇게 완벽한 모습을 하고 꿈틀거리고 있다는 데 대해 온몸으로 전율이 엄습해왔다.

우리 학교 이사장과 교장선생님은 '일본사람들처럼 질서를 유지하라,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 근검절약하라'는 소리를 입가에 매달고 다니신다. 그때마다 난 속으로 '그렇게도 일본이 좋으면 그 나라 가서 사십쇼!' 하고 비아냥거리곤 했는데, 이제서야 비로소 그 깊은 진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나는 이따금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게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펴는 '어글리 코리안론(論)' 중에 첫 번째가 유난히 다툼이 많다는 것이다. 과격하기 이를데 없는 데모대의 행렬, 멱살잡이 일쑤인 난장판 국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교통사고 현장 등을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과연 일본은 달랐다. TV에서나 길거리에서, 사람들끼리 실랑이 벌이는 장면을 못 보았다. 혹자는 짧은 기간에 본 편견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으나, 실제로 한국 대 일본의 검찰 고소·고발 건수가 100 : 1이 넘는다는 법원의 통계(1년에 11만 건 대 3,600여 건임을 인구비례해 계산)가 나와 있는 걸 보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단적인 예로, 일본 국회에서 각 계파별로 합의해 결정하는 수상 자리를 놓고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끝으로, 부관페리호에서 만난 한국인들로부터 받은 잔잔한 감동의 메시지 한 편을 남기고자 한다. 갈 때 배 안에서 제주도 귤을 대대적으로 수출하는 유통업체 임원 한 분과 동행했는데, 그는 시종 프로 인간이 되라고 역설했다. 그 길만이 극일(克日)하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교사라는 신분을 알자, 독립운동할 때 만주에서 만난 밀사처럼 나지막한 음성으로 간절하게, 신신당부하다시피 했다.

오는 배 안에서는, 동료 중의 한 명이 5년 전 이 배에서 인연을 맺었다는 한 보따리 장수 아주머니와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한 2년 이 장사에서 손 뗐다가 이번에 다시 시작했어요. 그땐 나 하나 관 두면 보따리 장수들 다 없어지겠거니 했는데, 웬 걸요, 80여 명이었던 게 지금은 그 다섯 배로 늘어났더라구요. 나도 그렇지만 이 사람들 빨리 없어져야 해요. 나라 말아먹는 존재들예요."

부산항에서 우리는 양 손에 짐 가득 든 그들 무리를 보며 '수출전선에 몸던진 자랑스런 대한의 아줌마들이여'를 조그맣게 부르짖으며 얼마나 가슴 뿌듯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갈 때는 부피 큰 농수산물을 들고 나갔다가 돌아올 땐 대여섯 배 이상 되는 금액의 알짜배기 전자제품을 사들여 온다는 거였다. 이슬비에 옷 젖는다고, 저런 개미군단 땜에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라며 그녀는 탄식어린 푸념을 쏟아냈다.

오갈 때 우리가 이용한 선박은 일본 국적의 것이었다. 그 배에서 이탈하기 전까지는 국제법상 우리는 일본 영토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빨리 한국 배가 수리되어 그걸 이용하면서 이런 얘기라도 속시원히 맘 놓고 털어놨으면 싶었다. 일본 땅에 있으면 사소한 일에도 애국심이 발동하여 자꾸 숨이 막혔다. 누구나 자기 조국을 벗어나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 한 부류임에 틀림없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걸 보고 느껴 메모리 용량이 한계에 다다르자, 내 머리가 곧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런 여행을 한번쯤 권유하고 싶었다. 'IMF 시대'일수록 더욱 많은 걸 나라 밖에서 보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단, 그 나라에 관한 사전 지식과 비용 절감에 대한 철저한 준비, 그리고 뭔가 꼭 한 가지 이상 얻고 와야겠다는 마음가짐이 돼 있어야 한다.

하세쿠라 일행의 세계일주(1613-1620), 이와쿠라 도모미 일행의 미국 시찰(1871), 이토 히로부미의 유럽 시찰(1882-1883) 등은 나라가 어려울 때 난관을 극복하고자 해외로 눈을 돌렸던 값진 여행들이었다.

우리는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부산역 뒷골목에 들러 해장국을 시켰다. 먹다가 반찬이 많이 남았는데도 "김치 좀 더 주세요!"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대뜸 한 접시 가져오면서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했다. 우리는 비로소 조국 땅에 와 발 디디고 있음을 실감했고,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밖에 나오자,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갑자기 몸이 나른해지면서, 보석 알갱이 같은 졸음의 입자들이 눈꺼풀 위로 가볍게 얹혀져 왔다.

역시 한국은 따뜻한 나라였다.